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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 칼럼] 괘종시계가 열세 번 울리고 나면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2월호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톰은 괘종시계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까 열두 번을 쳤으니 이번엔 한 번만 쳐야 하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종은 열세 번을 친다. (2021.12.07)
열세 살 때 친구네 집의 ACE 문고 전집에서 끌리는 제목으로 골라 들어 빌렸던 책을 단숨에 다 읽고 사랑에 빠졌다. 친구에게 책을 돌려주고 싶지 않아 며칠을 미적거렸다. 처음으로 책 도둑이 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했던 책이었다. 필리퍼 피어스의 책이었고, 그때 읽었던 제목은 ‘톰 깊은밤 13시’였다. 지금은 원제에 더 가까운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라는 제목으로 찾아볼 수 있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어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소설 맨 앞 장의 상황이다. 고대하던 여름방학의 시작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동생 피터가 홍역에 걸리는 바람에 톰은 이모네 집에 맡겨진 것이다. 일종의 ‘자가격리’,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들릴 그 단어. 톰은 낯선 이모네 집에 갇힌 채 심심해한다.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나가서 뛰어놀 만한 공간도 없다.
이모네는 큰 저택을 개조해서 만든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었다. 이 건물 주위에는 그것보다 나중에 지어진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차 있었는데, 내닫이창과 박공벽과 뾰족탑이 물결을 이루며 다세대 주택의 담벼락까지 바싹 다가와 있었다. 그 물결 속에서 큰 집이라고는 직사각형으로 꼴사납게 우뚝 솟아 있는 우중충한 건물뿐이었다. (…) “전에는 집 앞이 제법 널찍했지. 그런데 맞은편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길을 넓혀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옹색해졌단다.”
톰의 집에는 옹색하나마 좁은 정원이 있었고 제법 큰 사과나무도 한 그루 심어져 있었다. 여름방학 동안 피터와 함께 나뭇가지 사이에 놀이집을 지을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아이들을 싫어하는 이모네 주인집 할머니 눈치를 보며 숨죽여 하루종일 혼자 심심하게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심지어 이 집 1층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마저 톰을 약올리는 것 같다.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숫자와 시끄럽게 울리는 괘종의 숫자가 맞질 않는다.
“시계 바늘은 정확히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종은 한 시를 친 것이다. 그러니 종치는 소리만 듣고는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모와 이모부는 아이의 행태나 심리를 잘 모른다. 심심한 톰이 잠 못 이루고 늦게까지 책을 뒤적거린다거나, 딱히 배가 고픈 게 아니면서도 식품저장실을 기웃거리는 이유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 이모부는 밤 9시에 누워서 꼼짝 말고 있다가 아침 7시에 일어나라며 “너만한 나이에는 열 시간은 자야 해”라고 우긴다. 하지만 자기들은 자정 무렵까지 잡지를 읽거나 수다를 떨지 않는가. 게다가 톰의 침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욕실에서 밤늦게까지 들리는 목욕의 소음 때문에도 톰은 잠을 이루질 못한다. 아이에게도 사생활이 필요하고, 친구가 없다면 혼자서라도 상상력을 발휘해볼 만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톰은 괘종시계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까 열두 번을 쳤으니 이번엔 한 번만 쳐야 하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종은 열세 번을 친다. 열세 번? 톰은 생각에 잠긴다. 이모부는 잠자리에서 절대 나오지 말고 열 시간을 내리 자라고 했지만, 만에 하나 13시라는 시간대가 존재한다면 톰에게는 여분의 한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한 시간.” 숨죽여서 톰을 지켜보던 이 집이 안달을 내며 속삭이기 시작한다.
“너는 지금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야. (…) 서둘러! 빨리! 시간이 지나고 있어. 시간이 자꾸 가고 있단 말이야!”
호기심을 참지 못한 톰은 시계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확인하러 1층에 살금살금 내려간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늘 잠겨 있던 뒷문, 그 문을 열어봤자 쓰레기통이나 아랫집 사람이 주차해놓은 차밖에 없다던 뒤뜰 대신에, 지금껏 본 적 없던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전나무 숲, 잔디밭, 꽃밭, 끝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오솔길, 거대한 온실……. 톰의 입이 딱 벌어지고, 그는 맨발로 정원에 나선다. 마치 톰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정원은 그가 샅샅이 구경하거나 여기저기 몸을 숨기거나 기어 올라가 볼 만한 공간들로 가득하다. 매일 밤 시계가 13시를 치면 톰은 뒷문을 열고 너무나 화창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나간다. 톰은 현실 속 시간과 이 정원에서의 시간은 따로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톰은 자기만큼 외로워 보이는 여자애 '해티'와 마주친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처음 읽었던 열세 살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현대의 노동자 계급 소년이 빅토리아 후기 시대의 부유한 중상류층 출신 소녀와 티 없는 우정을 맺거나, 하녀와 정원사를 몇 명씩 부릴 정도의 재산이 되는 교외 지역 저택의 널찍한 정원이 아이들이 꿈꾸는 지상낙원처럼 묘사된다는 게 약간은 신경 쓰이기도 한다.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닿아있는 답답한 풍경과 폐수로 오염된 강물(그나마도 복개되어 발밑의 강의 존재를 신경 쓰는 사람도 얼마 없다)이 흐르는 동시대 도시와 비교한다면, 개발되지 않은(그래서 오염이 덜 된) 과거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아이의 건강을 지킨다는 명목(‘그래야 착한 아이지!’)으로 오히려 더 지켜야 할 규율이 늘어난 현대를 지긋지긋해하면서, “시간을 영원과 바꾼다!”라는 문구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도 그 정원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던 톰의 위험한 꿈을 대비시킨다. 외로운 아이는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이 현대판 립 밴 윙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속 시간의 흐름과, 또 그 정원 속에서의 성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즐거움과 애착의 고정점만을 바라볼 뿐, 각각의 시간대에 속해 있는 개별적인 주체들의 시간과 인생에 대해서까지 예측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톰이 알지 못하는 현실을 살아온 좀더 나이 많은 독자는 톰의 그 애달픈 열망과 함께, 순간을 붙잡아 영원으로 바꿔버리고 싶은, 시간에게 멈추라고 소리 지르는 천진한 소망이, 인생의 어떤 고비와 단면들을 맞닥뜨리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성장의 신비로움을 아직 알지 못하는 무구한 무지가 안타깝고 그립고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난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시간이 자꾸자꾸 흐르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거나 보지 못한 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순간만 살다가 영원을 놓쳐버린다. 시간여행의 가장 안타까운 진실은, 우리가 다른 시간대에서 아무리 멋진 모험을 즐겼더라도 결국은 그 시간대의 현실에 전혀 개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순진하고 착한 두 영혼이 만나 뛰어놀던 지상낙원을 상실하는 아픔은, H.G. 웰스의 단편 『담장에 난 문』을 읽었을 때의 슬픔에 비견할 만했다. 하지만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톰을 꼬마 유령 친구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던 외로운 해티의 인생에만큼은 ‘투명한’ 톰의 진심이 따스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점이 독자에게도 위안을 안겨준다.
외로운 아이는 어떻게든, 상상으로나마 친구를 찾아낸다. 열세 살의 나는 (그때 우리 집에는 마당이 있었고 심지어 옥상도 있었다) 방과 후에 텅 빈 집으로 혼자 돌아와, 강아지 방울이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지붕 기와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다. 책에서는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한손으로 방울이를 쓰다듬으며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읽었던 그 순간이, 내게는 한밤중에 몰래 뒤뜰로 나가는 톰의 뒷모습을 선연하게 그려볼 수 있었던, 책 속의 인물과 내가 가장 가까웠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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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
<필리파 피어스> 글/<에디트> 그림/<김경희> 역15,200원(5%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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