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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하루] 모든 순간이 좋은 때 - 생강

에세이스트의 하루 26편 - 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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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그렇게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속도에 맞춰 꽃도 피우고, 잎도 틔우고, 열매도 맺는 거였다. (2021.11.10)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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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어 한 산정호수에 가을 단풍 보러 함께 당일 여행을 간 게 2주 전이었다. 단풍나무 한 그루만 빨갛고,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는 건 분명하지만, 명성산은 아직 초록이 무성했다. 10월 셋째주 였고, 산정호수는 서울 기준으로 북쪽이라 예년이면 단풍이 한창일 텐데 의외였다. 올해 단풍이 늦나 보다 했다. 

이렇게 초록인 채로 가을을 보내야 하는 건가? 코로나도 겪었는데 단풍 없는 가을이 온대도 이상하진 않았다. 친구 부부와 1박 2일 완주 대둔산과 공주 공산성 여행을 10월의 마지막 주에 떠났다. 등산에 이은 걷기 여행은 완벽했으나 1박 2일 동안 한두 그루의 단풍나무만 만났다. 조바심이 났다. 정말 올해 단풍은 오지 않나 봐. 코로나가 불시에 찾아왔듯 단풍 들지 않는 10월 말도 이렇게 올 수 있나 봐. 

그렇게 10월의 마지막 주를 섭섭해하며 보내는 하루이틀새, 서울에 단풍이, 은행잎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내렸다.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가며, 병원에 버스 타고 가며, 동네 숲 산책하며 보니 불과 이틀 눈길 주지 않았다고, 밤새 내린 눈처럼 노랗고, 붉은 단풍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불현듯 닥치는구나. 주말에 찾은 산의 흐드러진 단풍 그늘 밑을 걸으며 생각했다. 

모든 만남은, 일상의 사건은 그렇게 순간에 왔다. 지난봄 갑자기 내 마음속에 들어온 설악산 울산바위처럼, 요즘 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빨간 나무 열매처럼. 오지 않을 듯하던 올해 단풍잎처럼. 지난봄 여행지 숙소 앞에 울산바위가 장대하게 버티고 있었다. 설악산을 그렇게 자주 다녔는데 마치 처음 본 것 같았다. 울산바위가 우뚝 서 있었다. 그날 그 바위가 내 가슴에 저벅저벅 걸어와 앉았다. 

봄에는 꽃피는 것만 알았다. 여름에는 싱그러운 초록이 전부인 듯 좋았다. 가을엔 단풍만 쫓았다. 그 나무들이 가을에 열매 맺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가을 단풍 찾아 헤매는 사이 나무 열매들이 눈에 밟혔다. 일주일에 며칠씩 산책 삼아 산길을 걸었는데 열매가 눈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감나무, 모과나무의 감과 모과가 아닌, 예쁘게 알알이 보석처럼 달리는 작은 열매들이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딸기인 줄 알았던 산딸나무 열매, 보랏빛 구슬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살나무 열매, 빨간 꽃이 핀 줄 알았더니 열매송이였던 파라칸다, 그리고 산사나무와 마가목 열매들. 보랏빛 꽃으로 여름 더위를 식혀주던 맥문동은 비취색 열매를 빚더니 가을이 깊어갈수록 점점 흑진주색이 되어간다. 

이렇게 세상에서 내가 놓친 것들, 그동안 엄연히 있던 존재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스치며 지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얼마 전 즐겨듣는 식물 세밀화가의 오디오클립에서 들은 은방울꽃의 빨간 열매도 생각났다. 봄에 피는 흰색 은방울꽃만 예쁜 줄 알았다. 그 이후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산딸나무도 봄에 고졸하게 피는 어여쁜 흰 꽃만 보았지, 산딸나무가 그토록 예쁜 딸기 모양의 열매를 가졌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식물에 제철이라는 건 없는 것 같다는 식물 세밀화가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배가 가을에 나온다고 가을이 제철인 과일이라지만 봄의 배꽃은 배나무의 호시절 아닌가. 배나무는 봄날 흥성하게 흰 꽃을 피워 열매를 빚어낸 것뿐이고. 그렇다면 정말 모든 순간, 봄의 꽃, 여름 잎, 가을 열매 모든 과정이 제철 아닌 순간이 없고, 모든 순간이 제철이다. 좋은 시절이다.

나무는 그렇게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속도에 맞춰 꽃도 피우고, 잎도 틔우고, 열매도 맺는 거였다. 나 혼자 내 눈에 뜨이는 순간만 기억하며 올해는 단풍이 없나 봐 조바심을 낸 거였다. 천천히 최선을 다해 와 준 올해 단풍이 더 반갑고, 이제라도 은방울꽃, 산딸나무 열매를 알아볼 수 있어 다행이다. 오늘도 숲에서 배운다. 나무는 또 하나의 제철을 준비하고 있다.


 


*생강

지구에 쓰레기를 덜 남기기를 고민하며 매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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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생강(나도, 에세이스트)

지구에 쓰레기를 덜 남기기를 고민하며 매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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