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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맨스 특집] 나는 아마 우정을 믿지 않았을 거야 - 백은선의 편지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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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은 서울이었지만 우리의 우정이 깊어진 것이 각자의 나라에서 가능했다는 게 놀라워.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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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나의 연인 때로는 나의 친구, 유에게

유야, 유야. 이렇게 불러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나는 요즘 시를 쓸 때 항상 유를 생각하면서 써. 

유가 읽어줄 거라고. 그러면 내 마음의 실이 조금 더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둥근 돌을 꼭 쥐고 단단해지는 것 같기도 해. 유는 내게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 빛이 지나간 자리의 어둠도 환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사람. 내가 가닿아 본 적 없는 새로운 관계를 열어주는 사람. 아주 활짝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처음 유를 알았을 때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친해질 수 있을지 몰랐어. 나는 언제부턴가 내게 남은 관계라는 것은 몇 남지 않은 친구들과 깊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곤 했거든. 또 우리는 너무 멀리 있고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시차가 있잖아.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은 서울이었지만 우리의 우정이 깊어진 것이 각자의 나라에서 가능했다는 게 놀라워. 너를 모르던 시절 누군가 내게 와서 너는 스페인에 사는 번역자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될 거야, 하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 믿지 않았을 거야.

지금 마드리드는 오후 여섯 시. 유는 운동을 다녀왔을지도 모르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아이를 재우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 한없이 기울어지는 시간. 

유야, 유는 결코 자만하지 않으면서도 늘 곧은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삶에 대해 유머를 잃지 않는 멋진 사람이라는 거. 생각해보면 타지에서의 생활에 부침이 있을 법도 한데, 유는 늘 씩씩하고 흔들리지 않아서, 나는 그런 유를 보며 늘 감탄하곤 해.

우리는 장난처럼 서로를 소울메이트라 부르고 네가 서울에 오면 무엇을 함께할지 상상하며 절망도 다 버틴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어져. 오늘은 리스트를 작성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같이 호캉스도 가고, 차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오래도록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다. 

내가 깊은 우울에 빠져 헤맬 때면 유는 어쩔 줄 몰라 하고 멀리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보태려 고분군투하지. 그게 다 느껴져서, 그 마음이 너무 진짜라서 가끔 놀랍고, 눈물이 날 것 같아.

우리는 집 근처 계곡에 가서 와인을 흥청망청 마시고 나는 말을 멈추지 못하는 병에 걸린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한다. 그렇게 잠에 드는 날에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해. 

유랑 있으면 나는 꾸러기가 되고 못나 보일까 걱정하지 않고 그냥 나로 있을 수 있어.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 남아 있었다니. 유는 늘 내게 새로운 발견이야. 

이토록 순수하게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유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건 내게 너무나 벅찬 선물. 

부디 유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




*백은선 

시인. 2012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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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백은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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