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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맨스 특집] 하미나 "찾습니다, 고통에 대처하는 새로운 기술"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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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믿음’이 아닐까요? 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믿음을 가지려면 모이는 것, 그럼으로써 고립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요. (2021.11.08)


“위기 상황에서 새롭고 자발적인 연대가 이루어지고, 타인의 고통을 폄훼하거나 섣불리 지워버리지 않고, 취약함을 공유하고 내보이는 것. 상실한 것을 충분히 애도하는 것.” 1991년생 우울증 연구자 하미나가 찾은 새로운 기술 중에 혼자서 하는 일은 없다.

하미나 작가는 대학에서 과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라는 긴 이름의 과학사를 공부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표적 살인사건 이후 여성임을 자각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와 이별했다. 생계를 위해 칼럼니스트, 과학기자, 글쓰기 교사 등을 전전하다 작가로 살기로 결심, 다양한 매체에 짧은 글을 기고해왔다. 

올봄 여성 활동가 9인의 목소리를 담은 『걸어간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의 기획자이자 저자로 참여했으며, 9월에는 온전히 혼자 쓴 첫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출간했다. 자신의 직업을 ‘논픽션 작가’라고 적는 날이 많지만 첫 책은 지독한 ‘혼종’이다. 우울증 당사자가 쓴 질병 서사이며, 우울증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집이고, 동시에 과학사 전공자의 시대 관찰기가 된 이유에 대해 하미나는 이렇게 말했다. “편을 들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 내 우울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설명할 지적인 자원들…. 제가 받고 싶었던 것들을 인터뷰이들에게 주고 싶었어요.” 그 마음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완주의 동력은 사랑과 우정이었다.


 

아직도 제 몸 어딘가 에필로그의 여운이 남아 있어요. 작가와 인터뷰이 사이의 신뢰, 만난 적 없는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군더더기 없는 응원이 감동적이었어요. 

제가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의 안위가 저와 무관하지 않은 일이 됐어요. 연결돼버린 거죠. 그래서 버겁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아요. 사랑과 미움을 잔뜩 느끼면서 지내다 보니 현실에 발붙인 느낌이 들어요. 인터뷰이들이 저에게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아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우울증에 대한 생각은 물론 질병 서사에 대한 생각을 전복시키는 책이에요. 

제목부터 기존의 질병 서사 책들과는 차별되죠. ‘우울증 여성들이 이렇게 아파요’ 하고 호소하려는 게 아니라, 그녀들을 입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책이에요. 그래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병명에 먹히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를 해석해내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도저히 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여러 단어로 조합하게 됐고요. 잘한 일 같아요. 리뷰 중에 ‘나도 이런 여자가 되고 싶다’가 있는 걸 보면. ‘우울증에 걸린 여자들’ 같은 제목이었다면, 이런 리뷰는 없었을 테니까.

우울증을 주제로 논문을 써서 대학원을 ‘탈출’한 후, 다시 1년여에 걸쳐 우울증 당사자들을 인터뷰했어요. 

자살 파트(7장)는 제 이야기로 시작해요. 기숙사에서 전기 포트 때문에 쫓겨나고, 어디서 살아야 하나 걱정하다가, 추근거렸던 교수들을 떠올리는 나 자신 때문에 죽고 싶었던 경험. 이런 것도 책에 쓸 수 있나? 자기 검열을 하게 됐어요. 많은 우울증 여성이 비슷한 경험을 해요. 무수한 이유로, 자신을 믿지 못해요. 우리에게는 더 많은 우리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또다시 흔들리는 때가 왔을 때, 이 책이 내 책장에 꽂혀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못 믿어도 이 여자들은 믿을 수 있으니까.

최근 들어 질병 서사를 담은 책이 늘고 있어요. 많은 경우, 여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고요. 이 책이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질병 서사는 좀 더 평등해져야 해요. 의사나 상담사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만 지식 형성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때 살기 위해서 우울증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제 경험과 불일치하는 책들이 많아서 절망했고요. 환자 당사자와 돌봄의 주체들이 지식에 참여할 때, 우리에게 더 잘 맞고 모두가 해피한 지식이 축적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쉬운 것은 환자 정체성으로만 쓰인 책이 대부분이라는 거예요. 그게 저만이라도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예요.

우울증 여성 이야기일 뿐 아니라 2020년대를 살아가는 이삼십대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인터뷰이를 이삼십대 우울증 여성으로 한정한 건 제 한계 때문이에요. 제가 잘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어요. 또 굉장히 내밀한 이야기이다 보니, 인터뷰이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고요. 다행히 돌봄의 영역까지 확장하면서, 그들의 가족이 겪는 고통까지 아우를 수 있게 됐어요.

이 책의 1부는 과학사이자 여성 잔혹사예요. 이전에도 과학을 공부한 이삼십대 여성이 쓸 수 있는 글을 부지런히 써왔죠. 

과학이 사회적 가치와 무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진화론은 우생학의 배경으로도 쓰일 수 있고, 자본주의 세계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을 탈락시킬 명분이 되기도 해요. 반대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전해줬듯이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한 우정을 발달시켜왔는지 증거가 되기도 하죠. 같은 과학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어요. 저는 과학자들이 더 많이 세상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길보라 감독이 이 책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적은 칼럼을 읽었어요. “우리에게는 연인 혹은 부부와 같은 일대일 관계 이외의, 이전에 없던 돌봄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책 속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더군요. 상상력에 시동을 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읽은 문장이에요. 

이길보라 감독과는 같은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했어요. 친구가 기꺼이 다정함을 사용해줬네요.(웃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믿음’이 아닐까요? 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믿음을 가지려면 모이는 것, 그럼으로써 고립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요. 믿음이 있어야 시행착오를 견딜 힘이 생기죠.

여자들의 우정이 우울증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물론이죠. 우리는 서로의 참고 문헌이 돼야 해요. 이 책에 나오는 우울증 여성들은 비록 더듬거릴지라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요. 워맨스를 부르는 멋진 여자들이죠.




*하미나

1991년생 출생. 논픽션 작가.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학부에서 지구환경과학과 철학을 함께 전공했다. 과학사및과학철학 협동과정 대학원에 입학한 뒤에는 길을 조금 틀어 과학사를 공부했다. 같은 시기 2016년 강남역 여성 표적 살인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여성 운동 단체 ‘페미당당’에서 활동가로 지냈다. 이 시기에 깊어진 우울증을 고민하다 이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원을 탈출했다. 생계를 위해 칼럼니스트, 과학 기자, 글쓰기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작가로 살기로 결심, 《시사IN》, 《한겨레21》, 《한국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짧은 글을 기고하고 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그간의 연구와 만남, 고민을 한데 모은 첫 책이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저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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