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한창분 – 김기혜
에세이스트의 하루 24편 – 김기혜
내가 고등학생일 때다. 용왕님이 우리 가족을 불렀다. 용왕님은 ‘가족 불행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크고 작은 불행이 집마다 한 번씩 돌아갔으니 이제 우리 집 차례라는 것이다. (2021.10.27)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
내가 고등학생일 때다. 용왕님이 우리 가족을 불렀다. 용왕님은 ‘가족 불행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크고 작은 불행이 집마다 한 번씩 돌아갔으니 이제 우리 집 차례라는 것이다.
“실직도 있고 질병도 있어. 이 집 애들 좀 보자. 둘 다 곧 대학생이네. 한참 술 먹을 때지.”
용왕님은 부드럽고 노련한 말투로 아빠에게 택일의 명령을 넘겼다.
“아, 안됩니다. 제 직장은 안됩니다. 건강도요. 애들이라뇨, 절대 안 됩니다. 저, 저희집에는 팔 십이 넘은 노모가 있습니다. 불행을 주시려거든 ㅈ, 저, 제 어머니에게 주십시오!”
아빠는 다급히 외쳤고 용왕님은 생긋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의 45° 방향 뒤에 선 엄마가 아빠를 쿡 찌르며 복화술로 말했다.
“쯤 양반인 거르 달라 해브아.”
“팔십 넘은 할머니라…. 치매로 할까? 가족들도 몰라보고, 똥도 싸고.”
“또, 똥이요?”
아빠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용왕님의 단호한 표정이 읽혔다. 조금이라도 막아보자는 간절함이 불쑥 외쳤다.
“집에서만 싸게 해주십시오!”
엄마는 다 틀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가족의 불행을 막은 럭키 참이 되었다. 내 할머니의 이름은 한창분이다.
용왕님은 럭키 참이 된 할머니를 아낀 게 분명했다. 할머니가 똥을 싸는 일이 찾아온 순서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가는 귀가 먹었고 이어서 망각이 찾아왔는데 나이, 관계, 식사 여부를 잊어갔다. 그러니까 거실 한 가운데서 똥을 싼 할머니한테 ‘왜 그랬냐.’, ‘말을 하지 그랬냐.’, ‘다음에도 이러실 거냐.’는 타박은 소용이 없다. 할머니 몸은 아흔이 넘자 기능이 점점 줄었고 할머니의 존재감도 바닥에 놓인 물건처럼 작아져 갔다. 그런데 똥의 존재감은 달랐다. 똥은 방에 틀어박힌 식구들도 단박에 불러내고 집을 나서던 이의 발걸음도 돌려세웠다.
“Shall we dance?”
똥의 말이었을까. 청을 받은 사람은 욕실 문을 열고 이리 오시라 손짓을 한다. 할머니는 기듯 구르듯 다가온다. 할머니를 변기에 앉히는 사이, 사고가 난 옷을 날렵히 치운다. 물소리가 흐르면 두 사람이 합을 맞춘다. 익숙한 안무다. 샤워기가 머리 꼭대기를 향할 때 할머니는 어푸어푸 얼굴을 비빈다. 물줄기가 목덜미를 지나 어깨에서 동그라미를 그린다. 할머니는 양팔을 훠이훠이 들어 올린다. 물기를 닦고 나서 할머니를 욕실 문지방에 앉힌다. 베이비 로션을 팍팍 덜어 할머니 몸에 펴 바르는데 할머니가 익살을 떤다.
“아이고, 얘가 나 시집보내려 그러네.”
연분홍 로션이 거칠한 피부 위를 겉돈다. 미끄덩미끄덩. 할머니를 누웠던 자리로 옮겨야 하는데 이때가 타이밍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를 언년이라 막 부르고, 새벽부터 밥 달라고 방문을 긁어댄 복수의 기회! 나도 할머니처럼 바닥에 앉는다. 등을 벽에 기대고 두 발로 할머니를 민다. 로션을 잔뜩 바른 할머니는 참기름 바른 똥강아지처럼 모노륨 장판 위에 스르르 밀려간다. 할머니도 어깻죽지 잡혀 끌려가는 것보다는 이 방법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입술은 삐죽이지만 먼 산을 봐준다. 로션 양이 과하거나 발의 힘 조절이 어긋난 날은 할머니가 장판 위에 팽그르르 돈다.
“에구구! 얘가 사람 잡네!”
엄살이 쏟아진다. 그래도 괜찮다. 할머니 기억은 매일 새로워지니까 나를 오래 미워하지 않을 거다. 옷은 마지막에 입힌다. 할머니는 모로 누워 눈을 붙이고 나는 할머니 방을 나선다. 둘의 얼굴은 함께 붉다. 할머니는 사나흘에 한 번 똥의 언어로 꺼져가는 존재감을 집안 가득 채우고 피붙이와 살을 비볐다.
10년을 꼬부라져 가던 할머니의 몸이 어느 날 쭉 펴졌다. 어른들은 온 가족이 잘 보이는 거실에 욕창 방지 매트를 깔고 할머니를 누였다. 씻기고 로션을 발라 봤어도 곧게 펴진 할머니의 몸은 낯설었다. 생활에 필요한 몸의 기능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 다 쓰지 못한 기운들이 꽤 있었나 보다. 두어 달 동안 할머니 몸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사라졌다.
할머니에겐 이제 표정만이 희미하게 남은 듯 보이던 밤이었다. 자러 가기 전 할머니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누군지 알까? 할머니가 누군지는 알까? 할머니는 지금 무얼 기다리는 걸까?’
그 때 고개가 내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다.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소리가 끌어 내어졌다.
“ㄲ-ㅏㄱ 응!”
할머니 눈이 까르르 웃었다. 침이 말라 벌어진 입이 환히 벌어져 방싯거렸다. 까꿍이라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네? 할머니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네! 그날은 할머니가 나를 안다는 편안함을 덮고 잠을 잤다. 그 밤 할머니는 숨을 거두었는데, 마지막에 눈으로 가족들을 찾아 그동안 고마웠다고 눈인사를 했단다. 스스로를 잊어가며 똥을 싸가며 우리 가족을 지켜준, 나의 한창분 할머니가 떠난 밤이었다.
*김기혜 심심풀이 마음풀이 글쓰는 아줌마. 자다가 이불킥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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