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특집] 덕질을 하다 소설을 써버림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0월호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탄생과 소멸, 혹은 섭리로 빛나는 소설과 그 소설의 작가들에 대하여. (2021.10.19)
“최애가 불타버렸다.” (7쪽)
소설 『최애, 타오르다』는 무너져 내리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마사키가 팬을 때렸대.” SNS에서 이 글자들을 확인한 순간, 아카리는 현실감을 잃는다. 밝혀진 것이 없는데도 그 사건은 하룻밤 사이에 급속히 논란이 됐다. 그러나 아카리는 ‘탈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사키를 더욱 응원하기로 결심한다.
“최애는 목숨이랑 직결되니까.” (11쪽)
1999년생인 우사미 린은 2020년 데뷔작 『엄마』로 미시마 유키오상을 수상했다. 사상 최연소 수상자였다. 그리고 올해 1월, 『최애, 타오르다』로 신인에게 주는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소설의 원제는 ‘推し, 燃ゆ’(오시, 모유), 제목을 구성하는 두 단어 모두 사전적 의미보다 ‘덕’적 의미로 더 널리 쓰인다. ‘오시’는 특히 좋아하고 응원하는 아이돌 멤버, 한국 팬덤어로 번역하면 ‘최애’(最愛)가 된다. ‘타오르다’라는 뜻의 ‘모유’는 ‘온라인상에서 비난, 비판 등이 거세게 일어 논란의 대상이 됐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의 한국 출판사 창비는 ‘지금 MZ 세대를 이해할 단 한 권의 소설!’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혼성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의 멤버 마사키를 응원하고 최애의 이름을 건 블로그를 운영하는 일 말고 아카리가 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들 어렵지 않게 해내는 평범한 생활도 내게는 쉽지 않아서, 그 여파 때문에 구깃구깃 구겨져 괴롭다. 그래도 최애를 응원하는 것이 내 생활의 중심이자 절대적인 것이라는 점만은 세상 그 무엇보다 명확했다. 중심이 아니라 척추랄까.” (43쪽)
최애는 “온 힘을 쏟아 빠져들 대상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유일한 존재이므로 (70쪽).
결말에 이르러 아카리는 ‘평범한 맨션’에서 최애의 빨랫감을 안고 베란다에 선 여자를 목격한다. 그렇게 ‘우상’은 ‘인간’이 된다.
그런가 하면 정세랑이 보여주는 팬심의 깊이는 가히 우주적이다. 2019년 발표 10년 만에 고쳐서 다시 낸 『지구에서 한아뿐』은 지구 여자(한아)를 향한 외계 남자(경민)의 오직 직진뿐인 사랑 이야기다. 남자는 2만 광년만큼의 우주를 건너 자신의 세계를 여자의 남자 친구에게 넘겨주고 대신 그 남자의 외양을 얻어 여자에게 온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그 세계를 온 생으로 받아 안는다. 정세랑은 이 경이로운 사랑, 그 옆에 나란히 ‘덕심’을 놓았다.
“어차피 다른 이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리고 포함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겠다. 그 세계만이 의지로 선택한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겠다…. 주영의 선택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고민 없는 아둔한 열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명확한 목표 의식의 결과였다.” (35쪽)
주영은 인기 가수 아폴로의 팬클럽 회장이다. 자신을 “아폴로를 잃는 순간 궤도에서 떨어져나가 빙글뱅글 어둠 속을 떠돌 수밖에” 없는 부속위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영의 세계는 아폴로가 캐나다에서 실종되면서 무너진다. 아폴로의 실종에 의문을 품고 추적하던 중 외계인 경민과 한아를 만나고, 아폴로가 우주로 떠났음을 알게 된다. 경민이 아폴로가 보낸 우주투어 티켓을 건넸을 때, 주영은 만류하는 국정원 직원 정규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모성(母星)과 위성(衛星), 태양과 행성 간의 궤도라는 우주적 질서로 스타와 팬을 연결하자 ‘덕심’은 우주의 섭리가 된다. 이쯤 되면 웅장해지는 가슴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2016년 『환상통』이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나왔을 때 쏟아진 비평, 혹은 보도의 온도는 ‘드디어 '빠순이'라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마련됐다’쯤이었다. 간간이 ‘순문학 지형에서는 보기 드문 아이돌 팬덤을 실감 나게 증언하는 문학적 기록’이라는 ‘호감’을 표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막 스물네 번째 여름을 맞이한 이희주 작가는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소설 뒤에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공적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저는 2008년 하면, 그해에 다른 중요한 일도 많았지만, 가장 먼저 동방신기가 컴백한 일이 떠올라요. 남들이 봤을 땐 뭐야, 싶을지 몰라도, 저는 그래요. 분명 저랑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얘기는 공적 영역에선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잖아요. 무시되기 십상이고요. 그래서 언젠간 이런 얘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긴 했어요.”
이듬해인 2017년은 조우리 작가가 창비의 플랫폼 <문학3>에 『라스트 러브』를 연재한 해다. 7장으로 구성된 본편과 소설 속 제로캐럿의 팬인 ‘파인캐럿’이 쓴 것으로 설정된 일곱 편의 팬픽이 교차하는 이 소설은 그리운 시절을 호출한다. 팬픽을 다시 읽고, 또래 여성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 설레며, 대가 없는 사랑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싶은 마음을 낯 모르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실린 조우리 작가의 글은 이렇게 맺는다. “무대 위의 여성과 무대 아래의 여성도 그렇게 서로를 지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여성과 소설을 읽는 여성 역시도 그렇게 서로를 지킬 수 있다.” 한 아이돌 팬의 사랑이 최애와 팬심과 문학과 여성을 모두 지켜낼 수 있을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0년, 1993년생 SF 작가는 이렇게 응답했다.
“인사 한번 나눠보지 않았던 그들의 새벽이 서러워 덩달아 뒤척였던 새벽이 많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다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 한숨만 쉬는 날이 많아졌다. (중략)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딱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누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이구나. 또 하나는, 그렇다면 나는 이 감정을 잊지 말아야겠구나.” _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작가의 말’
나와 비슷한 사랑을 경험한 작가의 소설이라면 마음을 맡겨도 좋지 않을까? 이 서문이 실린 소설집 어디에도 아이돌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소설이 뜨겁거나 서글프거나 최후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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