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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지가 사랑에 빠진 그림책] 우리는 서로를 관찰한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0월호
식물이 아닌 식물이 바라보는 사람을, 아기가 아닌 아기의 시선으로 본 엄마를. 대상으로 여겨지던 존재를 생명력 있는 존재로 생각해보는 건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2021.10.08)
도서관 그림책 코너에서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를 보았다. 별다른 감상 없이 슥 지나가려는데 표지에 제목이 두 번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핑크로 한번, 흐릿하지만 확실히 읽히는 그림자로 한 번. 제목을 두 번이나 써? 그것이 신기해 책을 넘겨보았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베란다를 차지하게 되었냐고요? 좋은 질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관찰해왔습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작가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아, 이 작가!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로 일러스트 모임에서 화제가 됐던 작가였다. 첫 책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지 수군수군 이야기한 기억이 났다. 그사이 두 권의 책이 더 나왔구나. 신작인 『엄마 도감』을 포함해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제목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에서 ‘우리’는 화분에 담긴 식물이고, ‘당신’은 식물 주변의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화자가 식물인 ‘사람 관찰기’라고 할 수 있다. 화원에 놓인 식물은 식물을 사러 온 사람을, 카페에 자리 잡은 식물은 카페 안 손님을, 회사 복사기 옆에 놓인 식물은 하루를 견디는 회사원을, 요가원에 가게 된 식물은 가쁜 숨을 헐떡이는 남녀노소를 관찰한다. 우리가 식물을 보는 것처럼 식물도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사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는 화가 마리안네와 모델 엘로이즈가 나온다. 마리안네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의뢰받고 오랜 시간 엘로이즈를 관찰한다. 그러는 사이 엘로이즈를 향한 연정이 싹튼다. 혼자 마음을 키우던 그에게 어느 날 엘로이즈가 말한다. 나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관찰자도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하면서 낯선 깨달음이 인상적이었던 이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 도감』은 관찰이라는 키워드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한 그림책이다. 이 책 역시 시작이 예사롭지 않다. ‘엄마가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어느 북토크에서 작가는 첫 문장이 조금 뻔한 것 같아 주저했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엄마는 원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당연하지만 흔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화자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화자가 아이인 ‘엄마 관찰기’이다. 제목대로 ‘도감’ 형식을 따라 엄마의 외모, 기능, 식습관, 배변이나 수면 활동 등이 아이의 눈을 통해 건조하게 기록되었다. 작가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바꾸어 보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식물이 아닌 식물이 바라보는 사람을, 아기가 아닌 아기의 시선으로 본 엄마를. 대상으로 여겨지던 존재를 생명력 있는 존재로 생각해보는 건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어깨 너머 경험하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북토크는 얼마 전 ‘책방 오늘’에서 했던 온라인 행사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이야기’였다. 작가는 『엄마 도감』이 만들어진 배경과 과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가 된 작가는 육아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엄마 역할을 왜 당연하게 여기고 엄마의 생각은 궁금해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고 그것이 이야기의 시작이 됐다고 했다. 당사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쏟아내지만 밖으로는 잘 새어나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면 육아의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TV에는 다양한 육아 프로가 있지만 결국엔 ‘그래도 아이가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로 끝난다. 그래서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 천사 같은 아이의 웃는 모습 한 번으로 사라지는 정도의 힘듦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친언니를 만나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언니는 회사에서 무자녀 직원 앞에서는 아이들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가정 이야기를 회사까지 가져오는 프로답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혹은 관심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기혼 무자녀인 나 역시 육아 이야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육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친구를 위로하다가 ‘그래도 아이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에 민망함을 느낀 적이 있다 보니 이제는 그냥 ‘아이고, 어쩌니’ 정도의 추임새만 넣으며 넘어갈 때가 많다. 각자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는 예쁘게 포장되거나 속으로 삼키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끼리만 주고받는 이야기가 되었나 보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이를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육아의 명과 암을 모두 말하는 목소리를 미리 적극적으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일단 『엄마 도감』으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마침 책의 마지막에는 ‘엄마 탐구 영역’이라는 문제지도 들어있으니 파트너와 함께 풀어보는 것도 좋겠다.
미리 한 문제를 풀어보자.
<문제>
엄마가 밥을 서서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서 있는 것을 좋아해서
2. 서서 먹는 밥이 더 맛있어서
3. 앉아봤자 금방 다시 일어나야 하니까
*권정민 수신지 만화책 『3그램』, 『스트리트 페인터』, 『며느라기』, 『곤』을 그렸으며, 여러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작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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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으며, 글과 그림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많다. 만화책 <3그램>, <며느라기> 등을 펴냈으며, 여러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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