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우주기행문 – 김기혜
에세이스트의 하루 19편 – 김기혜
숲길을 다 지나도록 아무도 즐거워지지를 않았다. 일정 변경이 필요했다. (2021.09.15)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
세 아이, 남편과 사려니숲길을 걸었다. 날이 흐려 숲은 꽤 쌀쌀했는데 첫째 아이는 홑겹잠바를 입고 오들오들 떨었다. 둘째와 셋째는 투닥거리다 아빠에게 야단을 맞고 땅만 보며 걸었다. 남편은 괜히 야단을 쳐서 여행 분위기를 망쳤다며 미간을 쪼그렸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상담원처럼 음을 높여서 “여보! 여기 너무 좋다. 혼낸 건 신경 쓰지 마.”하고, 큰아이에게는 씩씩한 목소리로 바꿔 “우리 조금만 걷고 돌아나가자. 아이고 춥네!”하고, 뾰로통한 둘째 아이 화장실 갈 때 혼자 가면 더 토라질까 봐 같이 뛰어가 줬고, 누나들 때문에 눈물이 글썽한 막내 옆을 지날 때는 숨죽인 목소리로 “저 누나 진짜, 쯧!” 같은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숲길을 다 지나도록 아무도 즐거워지지를 않았다. 일정 변경이 필요했다.
“여보, 애들 너무 지루해한다. 여기서 빨리 나가서 새로 생긴 <스누피 가든>으로 가자.”
“<스누피 가든>? 거기 뭐 있어! 그냥 사진이나 찍는 데 아니야?”
남편도 내 목소리 연기를 이어받았나. 타박하는 목소리로 퉁 던졌다. 남편은 계획과 규칙 안에서 평온한 사람인데, 예정에 없는 데다 입장료까지 낼 <스누피 가든>에 바로 긍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쓰는 내 속도 모르고 일단 싫다고 보는 남편 태도에 짜증이 솟았다. 감정을 다스리려고 속으로 랩을 지었다.
창덕궁 거기 뭐 있어. 그냥 사진이나 찍는 데지.
타지마할 거기 뭐 있어. 그냥 사진이나 찍는 데지.
오로라 거기 뭐 있어. 그냥 사진이나 찍는 데지.
지구상에 안 그런 곳 있기는 하단 말인지.
그러니까 (내 말이)
사진이나 찍으면 거기가 여행 아닌가.
찰칵! X는 은하계 저 너머 우주여행의 시대를 지구보다 먼저 시작한 별에서 지금 내 집 천장으로 여행을 왔다. 빛의 속도 이상으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인간이 인식하는 시공간에 영향을 주지 않아서 지구 어디든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콘크리트, 유리, 철근 같은 X의 별에는 없는 우주물질을 통과해 아파트 천장 벽지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X의 별 <기술의 발전> 박물관에는 우주여행 시대를 축하하며 인간 모형과 인간이 만들어 낸 화합물들을 전시해두었다. X는 집안의 것들과 미리 공부한 것들을 짝 맞추어 본다. 찰칵, 찰칵!
‘눈앞에 침대가 보인다. 구불렁 구불렁 뭉친 것이 이불인지 사람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뒤척, 덩어리 하나가 굴렀다. 사람이 누워 있었구나. 카메라에 내장된 어쓰피디아가 정보를 알려준다. ‘정수리 머리칼이 두피 쪽으로 납작 꺼져있다. 흑갈색 머리 사이 하얀털이 희끗희끗하다. 눈이 달린 쪽이 앞이다. 젖가슴은 포유류 어미를 뜻한다. 온몸에 살집이 두루 넉넉하다. 살이 출렁이기가 이불과 다르지 않고 젖가슴 모양이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 아이를 두 명 이상 낳아 기른 지구인 여자로 볼 수 있다.’ 여자는 ‘끄응’ 하고 일어서더니 방을 나갔다. 이제 이불을 감상하자. 흐린 날의 지구 바다 빛처럼 푸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유전자를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고 했는데. 저 여자는 어쩐 일로 40억 년 전 생명의 근원을 기억하는 것처럼 침대를 태초의 바다 빛깔로 채워두었을까. ‘쏴아-아.’ 방 밖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와 지구 금속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장면은 꼭 봐야 한다. <기술의 발전> 박물관에서 본 우주 물질들이 서로 부딪혀 만들어 내는 소리! 여자는 거실에 널부러진 ‘퀸베딩세트 북유럽 스타일’ 포장을 구깃구깃 뭉친다. 바스락 비지짓 지짓, 플라스틱 비닐이 마찰하는 소리가 낯설다. 여자가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탁 턴다. 허공에 뜬 이불이 출렁이며 아래로 서서히 내린다. 저것이 지구 중력이 자아내는 풍경이구나! 이불은 침대에 가라앉아서도 머금었던 공기를 잠시 내뿜는다. 오는 길에 보았던 청보리밭이 바닷바람에 폭닥이던 모양처럼. 장관이다. 찰칵! 아웃스타에 올려야겠다.
여자는 다시 이불 밑으로 들어간다. 현재 오전 10시. 안내서에는 인간들이 깨어나 노동을 하는 시간이라고 나와 있는데, 여자는 왜 다시 수면 자세를 취하는가? 방안을 둘러보니 블라인드로 햇빛도 차단해 두었다. 저 여자의 생체 정보에 이상이 있나? 어쓰피디아 스캐너를 다시 실행했다. ‘표면물질분석을 위해 1차 스캔을 실시합니다. Loading... 완료. 여자의 머리카락에 10km 근방 사려니숲길 분자 다량 발견. 진화된 앞 발목에 두른 바코드 정보는 ‘스누피가든 대인1-도민할인 30%’임. 뇌의 인지 및 감정 정보 분석을 위해 2차 스캔을 실시합니다. Loading... Loading...완료. 대뇌의 대인 감정 담당 영역이 현저히 과로 후 휴식을 취하는 상태. 생체 정보 완벽히 정상. 여자는 현재 ‘만사가 귀찮음’ 상태입니다.’
지구 태양빛을 받으며 활동하는 인간을 보려 했는데, 잘못 왔나 보다. 새 목적지를 입력해야겠다.
*김기혜 심심풀이 마음풀이 글쓰는 아줌마. 자다가 이불킥 전문 |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에세이스트의하루, 공모전,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