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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집필실과 레지던시

<월간 채널예스>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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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기도 한다. 남자든 여자든, 긴 글을 쓰려면 고정 수입과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2021.09.01)

일러스트 이내

종종 “글은 주로 어디서 쓰시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데뷔하고 한동안은 질문의 취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서 쓰긴 어디서 써, 집에서 쓰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부엌에서 쓰는데요”라든가 “냉장고 옆에서 씁니다” 하고 답한 적도 몇 번 있다.

질문자가 뭘 묻는지 알게 된 뒤로는 멋쩍게 웃으면서 “아이도 없고 아내도 회사에 다녀서요, 낮에 집에 혼자 있어요, 그래서 그냥 집에서 씁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 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기도 한다. 남자든 여자든, 긴 글을 쓰려면 고정 수입과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나도 어린 자녀가 있거나 부모님과 함께 사는 처지였다면 낮에는 어디로든 나가야 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솔직히 집필실을 얻을 경제적 여유가 없다. 차 한 잔 시켜놓고 종일 자리를 이용하는 것도 카페 주인에게 못할 짓이고.

그러다 지난해 여름 위기를 맞았다. 집의 에어컨이 고장 났다. 기사를 불러 수리를 했지만 며칠이 지나니 다시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나왔다. 원래 에어컨이란 물건이 수리가 어렵다고 한다. 아내는 더위에 강한 체질이고 제일 더운 낮 시간에 회사에 있지만 나는 정말 방법이 없었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스터디카페에 등록했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자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 좌석들을 둘러싸고 이용자들이 은근히 경쟁을 벌였고 근처에 식당도 많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카페가 문을 닫았다.

그렇게 몹시 생산 효율이 낮은 두 달을 보내고 난 뒤 결심했다. 2021년 여름에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문학관이나 문화관에 가 보자. 가서 전기요금 걱정 없이 에어컨 바람 펑펑 쐬면서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자. 가을에 멋진 원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적지 않은 기업과 문화재단, 지방자치단체들이 예술가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낮에만 이용할 수 있게 스튜디오를 빌려주는 곳도 있고, 작업실 겸 숙소에 밥까지 주는 곳도 있다. 사용료를 조금 받는 곳도 있고, 무료인 곳도 있고, 지원금까지 주는 곳도 있다.

이런 예술가 레지던시는 외국에도 흔하며, 특히 시각예술 분야에서는 보편적이라고 한다. 화가나 설치미술가들에게는 여러 날에 걸쳐 작업 공간이 필요할 테고, 운영하는 쪽에서도 눈에 보이는 작업물이 생기는 시각예술이 전시나 홍보 효과 측면에서 매력적이지 않을까 혼자 짐작해 본다.

반면 음악인들을 지원하는 레지던스는 별로 보지 못했다. 방음 문제도 있을 것 같고, 음악인들도 악기 관리나 녹음 설비, 협연과 교습 문제로 도시에서 떨어진 외딴 장소에 머물기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인들을 위한 창작 레지던시는 수요와 공급이 그 중간쯤인 모양이다. 내가 알기로는 2021년 여름 기준으로 국내에서 10곳 정도의 기관들이 소설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 예비 작가들에게 장단기 거주 공간을 제공한다. 한국 소설가라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혜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곳들이다.

 박경리 선생이 설립한 토지문화재단의 토지문화관, 서울문화재단의 연희문학창작촌, 이문열 작가가 사비로 세운 부악문원, 서울프린스호텔이 사회공헌사업으로 운영하는 소설가의 방, 강원도 곳곳의 펜션과 게스트하우스를 비수기에 작가들에게 제공하는 강원 작가의 방, 해남에 있는 백련재 문학의집, 담양에 있는 글을낳는집, 횡성에 있는 예버덩문학의집, 남해에 있는 노도 문학의 섬, 가파도에 있는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등.

나는 그 중 토지문화관에 7, 8월 입주하겠다고 신청서를 보냈다. 토지문화관은 문인과 문학 외 예술 분야 창작자를 매년 80명 남짓 받는다. 지난해까지 문인 793명, 예술인 337명, 외국 작가 및 재외동포 작가 114명에게 창작실을 지원했다. 은희경, 윤대녕, 권여선 등 유명 소설가들도 여기서 썼다. 그래! 나도 원주에서 멋진 작품을 쓰는 거야!

토지를 읽지 못해 죄송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김약국의 딸들은 감명 깊게 읽었다. 이 책을 안 읽으신 분들은 앞부분 김약국의 어머니 사연만이라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내게는 한국 문학 속 여러 슬픈 사랑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기막히고 인상적인 일화로 남아 있다.

그렇게 토지문화관에서 걸작을 쓸 계획을 세워 놓고 있던 나는 올 봄 한 젊은 작가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고 충격에 휩싸였다. ‘토지문화관 숙소에는 에어컨이 없습니다. 봄이나 가을에 머무르기에 좋습니다.’ 뭣이라! 다음 문장은 더 쇼킹했다. ‘벌레가 많다는 점도 예민하시면 고려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으악!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토지문화재단에 전화를 걸었다. 재단 관계자는 “방에는 에어컨이 없지만 도서관과 세미나실에 냉방시설이 있으니 낮에 거기서 작업하시면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번민에 빠졌다. 벌레에 대해서는 창피해서 묻지 못했다.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결국 짐을 싸서 고속버스와 택시를 타고 토지문화관에 들어왔다. 지금 이 글도 토지문화관 도서관에서 쓰고 있다. 옆자리에는 K 소설가가 교정지를 보고 있고, 그 맞은편에서는 J 소설가가 노트북 화면을 노려본다. 에어컨 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벌레는 많다. 많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후쿠시마에서 날아온 게 아닌가 싶은 거대한 벌이 드론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 매미도 크고 잠자리도 크고 나방도 크다. 내 손바닥만 한 긴꼬리제비나비 수십 마리가 날아다닌다.

토지문화관은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에 있는데, 흥업면 인구는 1만 명이 안 된다. 그런데 이 면의 면적은 서울 성동구, 동작구, 동대문구, 금천구를 합한 것과 비슷하다. 참고로 저 서울 4개 자치구에는 128만 명이 산다. 흥업면이 얼마나 인구밀도가 낮은지(그리고 곤충 밀도가 높을지) 느낌이 오시는지.

토지문화관은 흥업면에서도 매우 깊은 곳에 있어서, 면 중심지인 흥업면행정복지센터에서 버스로 15 정거장 떨어져 있다. 토지문화관이 그 버스 종점이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가려면 그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야 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곳 주변 환경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야생이다. 입주 첫날 “저녁에 산책하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다. 멧돼지나 뱀과 마주칠 수 있다고. 다행히 아직까지 멧돼지나 뱀을 만난 적은 없는데, 고라니가 울부짖는 소리는 자주 듣는다. 고라니 울음소리를 모르시는 분들은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한번 들어보시길. 지옥 제일 밑바닥에 갇힌 하급 악마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인간들을 저주할 때 그런 소리를 내뱉을 것 같다.

한데 이런 야생 환경이 괴로우냐면 그렇지는 않다. 작은 날벌레들을 아주 잘 잡게 됐고, 화장실 바닥에서 지네가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귀여워하게 됐다. 고라니 비명을 자장가 삼아 푹 자고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밖으로 나가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계곡에 걸린 구름을 감상한다.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은 작가에게(특히 나처럼 자가용이 없는 저탄소 뚜벅이에게) 엄청난 이점임을 알게 됐다. 갈 곳이 없으니 딴 마음을 먹지 못한다. 구내식당에서 주는 밥을 규칙적으로 먹으며 오전에도 쓰고 오후에도 쓰고 저녁에도 쓴다. 너무 심심해서 냉장고에 캔 맥주를 쟁여놓고 밤에 혼자 마시기는 한다. 맥주는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서 사 온다.

심지어 방에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도 장점인 것으로 드러났다. 방이 달아오르기 전에 옷을 차려입고 걸어서 2분 정도 걸리는 도서관으로 ‘출근’해야 한다. 그 거리가 절묘하다. 오가는 길이 피곤하지는 않지만, 심리적 장벽은 되어준다. 이래서 작업실을 마련하는구나. 집필실을 구하는 작가들을 한때나마 우습게 여겼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토지문화관에 오기 전에 작가 레지던시에 대해 걱정했던 점이 있었다. 머무는 작가들끼리 너무 친해져서 밤마다 술판을 벌이고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닐까. 딱 질색인데. 사실 그게 입주 신청을 주저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우려가 무색하고 민망하게, 이곳에 나와 함께 있는 이들은 다들 말이 없고 점잖다. 반경 1킬로미터 안에서 제일 사교적인 사람이 나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도 있기는 할 거다. 구내식당은 식사시간을 2부제로 운영하고, 두 사람 이상이 한 테이블에 앉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전에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하다. 박경리 선생이 살아계실 때부터 그렇지 않았나 상상한다. 박 선생이 만년에 토지문화관 입주 작가들을 보며 쓴 시가 있다. 〈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이라는 제목인데, 이런 구절이 있다. ‘식사를 끝내고 흩어지는 그들/ 마치/ 누에고치 속으로 숨어들 듯/ 창작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


일러스트 이내

원주에 와서 40일 동안 흥업면을 벗어난 적은 딱 두 번이다. 한번은 김민섭 작가를 만났을 때다. 최근 에세이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낸 김 작가가 원주시 한 북카페에서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열기로 했다. 그 자리에 놀러가기로 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작가는 원주에 왔고, 그가 잡은 시내 작은 숙소에서 둘이서 온갖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다른 한번은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여행을 갔을 때다. 아내가 서울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왔고, 원주역에서 내가 그 열차에 올라타 함께 삼척시 근덕면에 갔다. 근덕면은 흥업면에 서울 중랑구, 서대문구, 양천구, 광진구를 더한 것보다 넓다. 그러나 인구는 5000명을 조금 넘는다. 사람 없는 바다에서 멀미가 날 때까지 해수욕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40일 동안 서울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맥도날드도 스타벅스도 아쉽지 않다. 올림픽 중계도 전혀 보지 않았다. 반쯤 도인처럼 살고 있는데, 무척 홀가분한 기분이다. 부모님이 키우시는 개가 보고 싶을 뿐. 아무래도 내가 레지던스 체질인가 본데! 원고 작업도 집에서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잘 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서울에서 산만하게 하루를 보내곤 ‘감옥에 들어가야 겨우 정신을 차릴 것 같다’고 한탄하곤 했다. 해답은 레지던스였구나. 남해, 횡성, 담양, 가파도에도 언젠가 가보려 한다. 예술가 레지던스를 운영하는 기업과 재단, 지자체에 미리 감사드린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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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강명(소설가)

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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