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앞으로 아플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이번에는 커피를 포기했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또 도적같이 정말 크게 포기해야 될 일이 생기겠지. 술을 끊어야 한다든가. (안 돼!) (2021.08.20)
몇 달 전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오늘 컨디션이 안 좋겠거니, 넘기다가 며칠씩 증상이 계속되자 걱정이 올라왔다. 인터넷에 '가슴 뜀' 빠른맥' '빈맥' '부정맥'을 검색하니 갑상선 기능항진증부터 시작해 발작성 상심실성 빈맥이나 뇌졸중, 심부전까지 나왔다.
Henrik Widegren의 'Never google your symptoms(인터넷에 증상 검색하지 마)'.
알고는 있지만 멈출 수가 없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증상일지를 작성했다.
O월 OO일 일요일
약간의 스트레스. 심박수는 크게 변동 없음. 아침 점심 저녁 다 챙겨먹음.
O월 OO일 수요일
전일 저녁 와인 두잔. 오후 약간 증상 있음.
O월 OO일 금요일
아침 액상과당 들어간 커피. 8시반쯤 마시고 바로 증상 나타나 9시 15분쯤 가라앉음. 커피가 원인인듯.
O월 OO일 토요일
점심에 커피 진하게 마셨는데 느껴지는 두근거림 크지 않음. 커피가 가장 큰 변수인 것 같았으나 회사가 더 큰 변수 같다...
금요일에 커피를 마시면 두근거리는데 토요일에 커피를 마시면 두근거리지 않는다. 구글과 네이버를 포기하고 카카오톡 단체방에 물어보니 친구들끼리 알아서 출근성 공황증세로 결론을 내줬다. 비전문가들에게 증상을 물어보지 마십시오. 알고는 있지만 멈출 수가 없다.
3주쯤 기다려 병원 상담을 잡았는데,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고 교감신경이 저하되어 있으며 커피와 술을 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평범한 진단을 받기까지 두 달 정도가 걸렸고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긴 시간 동안 난리를 쳤던가...... 커피를 끊었더니 증상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 아침에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 대신 디카페인 커피나 차를 마신다.
술도, 커피도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지면 어느 순간 못 마시게 될 거라고는 알았지만, 이렇게 도적같이 올 줄은 몰랐다. 따지고 보면 도적은 나름 오래 준비하고 오는 거 아닌가? 털리는 입장에서야 '도적같이'가 급작스럽게 준비 없이 들이닥치는 사고지만, 터는 입장에서는 주변 경비도 확인해야 하고, 몇 시가 좋을지 예상 시간도 잡아보고, 담을 넘으려면 운동도 평소에 열심히 해놓고 그렇겠지. 차근차근 몸에 쌓이고 있던 불건강 요소가 어느 날 디데이에 맞춰 눈에 나타났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몸 어딘가가 삐걱댄다. 하나만 조심하고 살면 편할 텐데, 하나씩 더해져서 여러 개를 조심해야 한다. 건강해지려면 커피도 안 돼, 술도 안 돼, 운동 안 하기(?)도 안 돼, 밥 먹고 바로 눕기도 안 돼, 출근도 안 돼, 퇴근도 안 돼. 사실 그 모든 걸 하고 있다. 그러니까 또 새로운 곳이 삐걱대고, 조심해야 할 게 하나 더 생기고, 무한 반복.
내 몸의 삐걱거림은 대부분 기능에는 이상이 없는 증상이어서, 적당히 몸의 비위를 맞추고 며칠 건강한 시늉을 하면 다시 돌아온다. 커피 안 마시기는 그나마 '안 돼' 중에 제일 될 만한 일이어서 다행이다. 이번에는 커피를 포기했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또 도적같이 정말 크게 포기해야 할 일이 생기겠지. 술을 끊어야 한다든가. (안 돼!)
사회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여기까지는 질병이고 저기까지는 건강이며 거기부터는 장애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종종 우리 몸 안에서 질병, 건강, 장애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 『질병과 함께 춤을』, 15~16쪽
이제까지 스스로 건강을 평가하면 '완전무결 튼튼이는 아니지만 그냥저냥 일상생활할 만한 건강체'로 생각해왔다. 하나씩 스스로 평가에 반하는 증상이 생길 때마다 위축됐는데, 어차피 크나 작으나 모두 어느 정도는 '현상'을 가지고 있다. 커피와 술을 끊는 것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순간. 도적이 크게 덮쳐와 나의 모든 것을 빼앗는 순간을 상상한다. 어쩌면 지금의 커피 안 마시기는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준비 동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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