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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유레카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6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1848년에 에드거 앨런 포는 기발한 논리로 나름의 빅뱅 이론을 펼쳤다. (2021.08.20)
에드거 앨런 포는 나를 순순히 놔주지 않았다. 19세기 영어를 꾸역꾸역 21세기 한국어로 모조리 바꿔놓은 뒤에도 여전히 찜찜한 부분이 남아 있어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영어와 한국어를 대조하여 읽어가며 의문점을 해소해야 했다. 문장의 표면적 의미만 간신히 이해했을 때는 쉼표 하나, 줄표 하나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채 원문의 구조를 고스란히 옮기다시피 해야 했지만, 저자의 취지와 의도를 나름대로 파악한 뒤에는 독자가 정확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워 어휘와 구조에 조금이나마 손을 댈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 저본과 함께 참고 자료로 건넨 『에드거 앨런 포, 유레카, 과학적 상상력』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포의 친척이자 포 재단 회장인 해리 리 포의 『에버모어』와, 무엇보다 스튜어트 러바인과 수전 F. 러바인의 주석판 『유레카』 덕을 톡톡히 봤다. (러바인은 문학평론가이고 문헌학적 주석이 대부분이어서 포의 과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번역자의 몫으로 남았지만.) 다만 19세기에 미국에서 쓰인 글의 맛을 21세기 한국 독자가 느끼게 하는 불가능한 임무에 번역자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독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1848년에 에드거 앨런 포는 기발한 논리로 나름의 빅뱅 이론을 펼쳤다. 시대를 앞선 그의 우주론은 철저히 동시대인들에게 외면받았으며 21세기 들어서도 그의 명예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 애호가들과 문학평론가들은 그의 과학적 상상력을 이해하지 못했고 과학자들은 『유레카』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거나 설령 들어봤어도 딜레탕트적 사변으로 치부했다. 하긴 자연신학과 문학이론이 근원적으로 어우러진 그의 우주론을 현대인이 선뜻 받아들이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중간에 낀 번역자는 얼마나 좌불안석이었겠는가.
『유레카』에는 포의 일생에 걸친 사유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아무리 봐도 에세이가 분명한 이 글에 ‘산문시’라는 알쏭달쏭한 부제가 붙은 이유를 이해하려면 「작법의 철학」과 「아른하임의 영지」를 비롯하여 그의 시론, 예술론이 담긴 글들을 참고해야 한다. 한국어판 출판사에서 『유레카』를 시인선의 한 권으로 선정한 데는 ‘산문시’라는 단어가 한몫했을 것이다. 이 책의 담당 편집자는 (시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내 원고를 받아들고 어떤 표정을 지었으려나. 물론 『유레카』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면 포가 자신이 정의한 시의 개념을 거스르면서까지 이 책을 시로 규정한 이유가 납득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유레카』는 에드거 앨런 포가 1848년 2월 3일 뉴욕 소사이어티 도서관에서 했던 강연을 토대로 쓴 책이다. 원고를 들고 출판업자 조지 퍼트넘에게 찾아간 포가 제시한 초판 발행 부수는 5만 부였다! (실제 발행 부수는 500부였으며 포가 선인세로 손에 쥔 금액은 14달러였다.) 포는 이 책을 자신의 최대 걸작으로 여겼으나 동시대인들은 「열기구 사기」 같은 속임수 글 아니면 과학책으로 포장된 문학이론서로 치부했다. (「열기구 사기」는 『한스 팔의 전대미문의 모험』에 실린 단편으로, 열기구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가짜 뉴스를 신문 기사 형식으로 쓴 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치유의 책으로 보고 싶다. 포가 『유레카』를 쓴 데는 아내 버지니아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지, 왜 불의와 고통이 존재하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영 헤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포는 이 책에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포에 따르면 그의 답은 ‘진리’다. 종교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거나 찾고 싶지 않은 사람은 포의 답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인류의 종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유레카』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555매다. 6월 9일에 번역을 시작(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참고 자료를 먼저 읽고 다시 번역에 착수)하여 8월 11일에 최종 원고를 넘겼으니 꼬박 두 달, 그러니까 평소 작업 기간의 세 배가 넘게 걸린 셈이다. 생계형 번역가를 자처하는 주제에 이렇게 가성비 낮은 원고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이 시련을 이겨내고 더 실력 있는 번역가가 되고자 했던 욕심의 대가는 줄줄이 미뤄진 다음 책들의 마감과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머릿속에 깊숙이 들어가 그의 고통과 시련이 거대한 통찰이라는 결실을 맺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죽지 않았고 조금 더 강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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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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