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소설가 하승민, 소설 기계의 등장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13년간 직장인으로 살다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마치 출퇴근을 하고 회사의 연간 계획을 짜듯이 일상을 설계한다. (2021.08.06)
직장을 그만둔 한 사람의 집에서 알람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 오후 1시에 한번, 3시에 한번, 9시에 한번, 12시에 한번. 반복되는 루틴은 주말에도, 모두가 알람을 끄고 느긋하게 잠드는 공휴일에도 멈추지 않는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스릴러 소설의 도입부 같지만, 이건 하승민 소설가의 소설 쓰는 방식이다. 13년을 IT, 금융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으로 살다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마치 출퇴근을 하고 회사의 연간 계획을 짜듯이 일상을 설계한다. “회사 생활한 경험이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돼요. 장편소설을 쓰려면 긴 루틴을 버텨야 하거든요. 하루에 목표를 정해두고, 알람을 맞춰 놨어요. 기상 시간에 한 번, 글쓰기 시간에 한 번, 식사 시간에 한 번, 운동할 때, 한 번, 독서 시간에 한 번. 단 하루도 쉬지 않고요.(웃음)”
꽉 짜여진 일상의 목표는 하나다. 1년에 장편소설 한 편씩은 낼 것. 정확히 그 계획대로 데뷔작 『콘크리트』 이후 1년 만에 신작 장편 스릴러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이 나왔다. 이 정도면 ‘소설 기계’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강한 전개로 독자를 사로잡는 이 소설은 1980년 광주에서 트라우마를 갖게 된 지아가 제2의 인격인 혜수를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몸과 정신을 혜수에게 장악당하고 19년 만에 깨어난 지아는 어느 산 속에 삽을 든 채 젊은 여자의 시체를 파묻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 하필 19년일까?
“사실 19년은 제가 서울에 있던 기간이에요. 2000년에 서울에 올라왔고 회사를 그만둔 게 2019년이니까요. 첫 장편소설로 데뷔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게 됐는데, 직장인으로 산 나는 나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거예요. 그게 이번 장편소설의 시작이었어요.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19년을 살면 어떤 기분일까. 거기서 출발해서 이야기를 증폭시킨 거예요.”
이중인격 중 하나인 혜수는 쇠락한 항구도시 묵진으로 떠나 19년 간 다른 인생을 산다. 여러 캐릭터와 사건이 얽혀 퍼즐처럼 짜 맞춰지는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인물 설정부터 공간, 사건 전개까지 정말 치밀하게 짜요. 엑셀 시트가 3개 있었어요. 주인공이 74년생, 76년생, 79년생인 3가지 버전 스토리를 다 한 번씩은 써본 거죠. 날짜를 쓰고, 그 해에 모든 캐릭터들이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지 촘촘하게 정리하는 거예요. 심지어 거리를 계산해서 두 인물이 스쳐 지나가는 동선까지 맞는지 확인할 정도였어요.(웃음)”
주인공 ‘지아’가 이중인격 ‘혜수’에게 몸과 마음을 장악당하는 장면은 강렬하다. 뉴밀레니얼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고 새로운 시대로 갈 것이라는 희망이 가득한 순간, 지아의 삶은 본격적인 전락으로 향한다. “제가 기억하는 뉴밀레니얼은 많은 사람들이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제로 변한 건 없고 불안감만 가득했던 해였어요. 사실은 IMF 이후 힘든 시기였고 새천년의 희망보다는 세기말의 분위기가 강했죠. 그래서 제 소설에서도 뉴밀레니얼이 밝고 희망찬 시간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아는 또 다른 인격인 혜수가 되면서, 중심지를 벗어나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묵진으로 가요. 그렇게 시대상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아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혜수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몰락한 묵진 사람들의 삶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작가는 금융권에서 일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화이트칼라인데,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제2금융권, 제3금융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들의 일상을 굉장히 많이 보게 돼요. 휴대폰 통신비를 내지 못해서 빚을 지는 사람들이요. 우리가 잘 모르지만,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도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물론 단순한 유희거리로 그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조사를 많이 하죠.”
증폭되는 사건은 나락에 떨어진 인물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복수와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들이 ‘절대악’으로 보일 법도 한데, 소설은 이해의 여지를 남겨 둔다. “절대악이 아니라 만들어진 악에 대해 그리고 싶었어요. 핵심은 이거예요. ‘많은 날 중에 단 하루가 잘못된 것뿐이었다. 그 하루가 인생을 뒤집어놓았다. 누군가의 결정이 너무 많은 사람의 인생을 헤집었다.’ 다르게 살 수 있었는데, 지아와 혜수는 분열되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던 거예요. 사랑받고 싶었던 인격체였는데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나뉘어진 거죠. 지금 한국사회를 은유하는 알레고리이기도 하고요.”
작가는 계획대로라면 매년 한 편씩 10년간 10권의 장편소설을 내놓을 것이다. 왜 스릴러였냐는 질문에,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스릴러 장르에 맞았고, 이후 다른 장르도 도전해볼 것이라 답했다. 안개로 자욱한 묵진의 세계를 만들어낸 그는 어디로 갈까? 새롭게 등장한 ‘소설 기계’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하승민 댄서를 꿈꿨고 때때로 락밴드를 했다. 극단을 어슬렁거렸으나 공연기획자로서의 삶은 길지 않았다. 돈은 필요한데 정장을 입는 건 싫어서 IT 회사를 다녔다. 『콘크리트』는 세상에 내놓은 첫 소설책이다. 20세기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다. IT와 금융업에 종사하다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는 건 이제껏 거쳐 온 많은 취미 중에 건져 올린, 유일하게 쓸 만한 직업이다. 코미디언과 격투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일찌감치 접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하고 싶다 해도 재능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음악만큼은 놓지를 못해 간헐적으로 밴드에서 곡을 쓰고 노래를 한다. 단편소설 「우주를 가로질러」로 제11회 심산 문학상 최우수상, 단편소설 「사람의 얼굴」로 뉴 러브 공모전 당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뉴 러브』에 「사람의 얼굴」을 수록했다. 또 다른 소설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을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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