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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복세편살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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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는 ‘눈팅’의 달인이 되어 10대의 언어까지도 원어민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2021.08.06)


7월 22일 목요일 저녁 7시, 양산의 동네 책방 ‘당신의 글자들(당글)’에서 『향모를 땋으며』(에이도스, 2020) 번역자와의 책담冊談이 열렸다. 책담은 1시간 30분 가까이 유튜브 생중계로 진행되었는데, 의례적 덕담과 번역가의 삶에 대한 평범한 질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다 느닷없이 번역가의 언어 감각을―즉, 번역 실력을―샅샅이 파헤치는 검증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번역이라는 작업이 언어를 다루는 작업인데, 그럼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실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 번역가님의 언어에 대한 감각을 알아볼까 해서 신조어 퀴즈를 해볼까 합니다. 이름 하여 신조어를 ‘맞차라!’” 

(아래 영상 : 28분 30초) 


진행자(책방지기)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을 보니 그가 이 순서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한때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 심취했으며 젊은 세대의 언어에 빠삭하다는 사실을. 이미 나는 ‘눈팅’의 달인이 되어 10대의 언어까지도 원어민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첫 번째 문제 ‘순삭’은 나의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2000년대 말에 온라인 게임에서 발원하여 시간, 음식 등 다양한 대상의 ‘순간적 삭제’를 일컫는 이 낱말은 ‘초열흘과 초하루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 ‘순삭旬朔’과 더불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언중의 머릿속 사전mental lexicon에 각인되지 않았던가.

내가 자신감을 잃고 당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 ‘얼죽아’는 듣도 보도 못한 신조어였다. 세 번째 문제 ‘자만추’, 네 번째 문제 ‘삼귀다’에 이르기까지 나는 어리둥절한 채 “처음 들어보는데요”를 연발해야 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문제 ‘복세편살’이 울려 퍼지는 순간 내가 처한 난처한 상황의 본질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신조어가 유서 깊은 형식인 사자성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간파했다. 저들이 내게 캐묻는 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 접할 기회가 전혀 없던, ‘아재의 신조어’였다. 왜 나는 신조어를 10~20대 청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가. 뇌의 가소성을 강조하는 글을 숱하게 읽고 번역해놓고도 왜 중장년들의 조어 능력을 과소평가했던가.

결국 나는 다섯 문제 중에서 두 문제밖에 못 맞히는 초라한 성적으로 체면을 구긴 채 책담을 이어가야 했다. 초대 손님의 사기를 띄워주려던 주최측도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낮은 점수를 받은 덕에 내겐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겼다.

나는 신조어에 인색하다. (옆에서 아내가 “‘인색’이 아니라 ‘무식’ 아니야?”라며 거들지만―신조어로 ‘팩폭’이라고 한다―못 들은 체하고 계속 키보드를 두드린다.) 번역가는 정치 이념이 아무리 진보적이어도 언어에서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번역하는 책이 1년만 읽히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7년에 출간된 나의 첫 번역서 애덤 스미스의 『페이퍼 머니』(W미디어, 2007)는 아직까지도 절판되지 않은 채 계속 팔리고 있다. 나의 목표는 내 번역서들이 50년 뒤에도 절판되지 않고 도서관 서가에서 밀려나 서고에 처박혔다가 폐기되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레카』는 173년 전인 1848년에 출간되었는데도 (물론 술술 읽히진 않지만) 거의 모든 낱말이 영한사전에 실려 있고 지금도 쓰이고 있다. 극소수의 예외는 에드거 앨런 포가 만든 신조어들이다. 그렇다. 신조어는 수명이 짧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신조어가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 돌을 채 넘기지 못한 채 잊힌다. 소통의 무대가 온라인으로 이동한 지금은 특정 집단의 은어가 소셜미디어나 게시판을 거쳐 일반인의 언어생활에 스며들기도 하고,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속어를 유명인이 영문 모른 채―또는 어원 모른 채―쓰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폐쇄적 집단 안에서만 쓰이다 조용히 사라졌으면 싶은 신조어들이 상대 집단이나 언론에 의해 소환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물론 어떤 신조어는 어원이 잊힌 뒤에도 살아남아 결국 사전에 등재되기도 한다. 번역자인 나도 이따금 부푼 꿈을 안고 신조어를 세상에 내보낼 때가 있다.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1화에서 소개한 ‘글럼프’도 그런 단어 중 하나다(비록 편집부의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때로는 신조어 아니면 번역이 불가능하겠다 싶은 단어를 만나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의 『약속의 땅』(웅진지식하우스, 2021)을 번역하다가 ‘social climber’라는 낱말이 나왔는데, 이 낱말의 주인공인 태러크 샐러히와 미카엘레 샐러히를 검색해보니 ‘관종’이라는 신조어가 제격일 것 같아 “워싱턴의 관종[일부러 특이한 행동을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_옮긴이] 부부”라고 번역했으나 편집자가 “워싱턴의 관심 끌기 좋아하는 괴짜 부부”로 고쳤다. 속상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디 『약속의 땅』이 스테디셀러가 되어 ‘관종’보다 더 오래 살아남길!

‘복세편살’은 내가 넘겨짚은 대로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무려 2012년 1월 7일의 한 블로그 글에 ‘10대들이 쓰는 줄임말’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2011년에 생겼다는 얘긴데, 10년 묵은 낱말을 신조어로 알고 있던 주최측의 시대착오와 그마저도 금시초문이던 나의 무지는 차치하고, 이 낱말이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는 건 시대를 초월하여 세태를 반영하는 힘을 가졌다는 의미일 테다. (국립국어원이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언젠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다음번에 “let it be”“take it easy” 같은 표현을 만나게 되면 한번 써먹게 될지도 모르겠다.


* 나처럼 신조어에 인색한 독자를 위해 나머지 세 문제의 정답을 소개한다.

얼죽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자만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함.

삼귀다: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에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로, ‘사귀다’의 ‘사’가 ‘4’와 발음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4’ 대신 1이 적은 ‘3’으로 대체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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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승영(번역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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