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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마이 프레셔스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4화
물론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땀이 들어간 결과물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조차 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번역자는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르겠다. (2021.07.23)
1843년 《필라델피아 달러 뉴스페이퍼》 지의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상금 100달러를 받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황금벌레」(『모르그 가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전집 1』, 시공사, 2018)에서 노예 주피터는 주인 르그랑을 충심으로 섬긴다. 채찍이나 당근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화자는 르그랑의 친척들이 주피터에게 충성심을 주입(세뇌?)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런 식으로.
“산책길에는 주로 주피터라는 늙은 흑인이 동반했는데, 그는 르그랑 집안이 몰락하기 전 해방된 노예였지만 어떤 협박이나 약속을 들이밀어도 젊은 ‘윌 주인님’을 보필할 권리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르그랑의 지력이 다소 불안정하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이 떠돌이를 감독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주피터에게 그런 고집을 심어줬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125쪽)
여기서 ‘르그랑’을 ‘책’으로, ‘친척들’을 ‘출판사’로, ‘주피터’를 ‘번역가’로 대치하면 나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된다. 번역가는 책의 자발적 노예다.
사건의 발단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몸서리치는 금기어 ‘주인의식’이다. 노예에게 주인의식이 가당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본디 주인의식은 주인이 가지라고 있는 게 아니라, 주인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주인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20년 전 기술번역에 몸담고 있을 때는 번역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와 번역을 제공하는 번역사(이유는 모르겠지만, 출판번역을 하는 사람은 번역‘가’로 불리고 기술번역을 하는 사람은 번역‘사’로 불린다) 사이를 번역중개회사가 가로막고 있어서 클라이언트와 번역사가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클라이언트는 실제 번역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번역사는 실력과 경력이 아무리 늘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번역사가 쏟아낸 번역문은 번역 메모리(Translation Memory)라는 이름으로 번역중개회사의 자산이 된다. 번역사는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 어떤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며 결과물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출판번역가로 전향하긴 했지만, 나의 일이 ‘노동을 파는 것’이라는 인식은 그때가 오히려 더 확고했다. 하루에 영어 단어 3,000개씩 일감을 받아 단어 한 개당 45원을 받고 한국어 번역을 넘기면 나의 하루가 사라진 대신 135,000원이 손에 남았다(정산은 한 달에 한 번씩 받았지만).
출판 번역가로 데뷔하고 나서는 노동의 성격이 사뭇 달라졌다. 무엇보다 클라이언트를 직접 상대하게 되었고 책 표지에 이름이 박혔으며 나의 번역문은 물심양면으로 보호받는 저작물이 되었다. 이 뿌듯한 변화의 결과는 내가 책의 (어처구니없게도!) 주인인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인의식의 부작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편집자와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내 문장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 편집자나 교정·교열자가 문장을 고칠 때마다 ‘감히 내 문장을 건드려?’ 하면서 (겉으로) 발끈하거나 (속으로) 부글부글한다. 번역자와 편집자는 더 좋은 문장을 내놓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관계이지만 둘의 에고가 부딪히면 협력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으로 바뀐다.
둘째, 의뢰받은 책을 한 달 안에 끝내지 못하면 생계에 지장이 생기는데도 번역이 맘에 들 때까지 몇 달을 쏟아붓는다. 번역은 노동력의 대가를 받는다고 하기엔 일정한 시간을 일했을 때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고,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고 하기엔 노동이 길어져도 대가가 늘지 않는 독특한 노동이다. 번역자는 공을 들일수록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기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셋째, 일과 삶의 구분이 없어진다. 금요일 오후 5시에 역자 교정을 부탁받으면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원고와 씨름한다. 물론 편집자는 내가 주말을 반납한 채 곧장 작업을 시작하리라 기대하지 않았겠지만―혹시, 설마…… 아니, 그럴 리 없어―내가 늑장을 부리면 인쇄가 늦어질 수 있으니까. 그런가 하면 의욕이 지나쳐 주말에 편집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의견을 제시할 때도 있다. 업무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주말에 연락했다고 해서 나를 꼰대로 여기진 않겠지만―혹시, 설마…… 아니, 그럴 리 없어―나의 소중한 책을 위해선 꼰대가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답장이 올 때까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린다.
그러다 가끔 나의 위치를 자각(?)하게 만드는 일을 겪기도 한다. 번역가로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감과 창작 의욕에 불타던 어느 날 편집자에게 물었다.
“문장을 다듬어서 드리는 게 좋을까요,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게 좋을까요?”
편집자의 대답은 이랬다.
“다듬는 건 저희가 할 테니까 임의로 고치지 말고 원문 그대로만 번역해주세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역량과 재량을 인정받아 문장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줄 알았건만 출판사가 번역자에게 바라는 건 초벌 번역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사건이 약이 되었던지 그 뒤로는 단어 하나도 빼먹거나 덧붙이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최근에는 정반대 반응을 얻은 적이 있다. 원문에 충실하게 옮겨 맛보기 원고를 넘긴 내게 편집자는 촘촘한 우리말 문장이 다소 딱딱하고 덜 친근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실은 나도 원고를 넘기면서 좀 더 다듬어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아주 많이 팔아야 하는 책이어서―물론 모든 출판인은 자신의 모든 책이 ‘아주 많이 팔아야 하는 책’이라고 항변할 테지만―모든 독자에게 인내심을 요구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가 책의 주인이 맞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허울만 좋은 저작권은 내 번역서가 절판되었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될 때 말고는 쓸모가 없고, 책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매절 계약을 맺은 내게는 돌아오는 게 없으며, 책에 문제가 있을 때 욕을 먹는 것만이 오롯이 번역자의 몫이다. 주인의식은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 바보가 ‘정신 승리’를 하기 위한 구실일까? 계약서에 ‘갑’으로 표기되는 ‘을’의 자기기만일까? 책 표지에 이름이 실려서 생긴 착시 효과일까?
물론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땀이 들어간 결과물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조차 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번역자는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르겠다. 정신 승리이든 자기기만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 내 앞엔 원고와 나 둘뿐이고, 마감 때까진 누구도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황금벌레」 속 노예 주피터는 사실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주피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텍스트의 세상을 바라보며 말한다. 마이 프레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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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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