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운 좋게 살아왔다. 부모님 덕에 열살 무렵 서울에 정착할 수 있었고 이후 벗어난 적 없었다. 독립과 결혼을 거치는 동안에도 주거지를 선택함에 있어 서울 외 선택지는 두지 않았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직장이, 내게 필요한 많은 것들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탓일 테다.
이사를 한 달 앞두고 있다. 한동안 주말은 물론이거니와 주중 저녁에도 집을 보러 다녔다. 부동산 중개인만큼 속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대가 또 있을까?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자산과 커져만 가는 욕구의 간극 속에서 ‘나는 어쩌자고 이 정도로밖에 못 살아 왔나’ 한탄하지만 겉으로는 여유와 대안을 가진 척 한다. 대출 이자를 얼마만큼 내야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할까 암산하면서.
지도 앱을 켜고 직장이 있는 국회의사당역에서 동서남북으로 한 시간 이내 소요되는 지역을 찾았다. ‘여의도 출퇴근 지역’이라는 키워드도 열심히 검색했다. 처음 눈여겨본 곳은 9호선 염창, 등촌, 증미, 가양역 인근이었다. 서울에 25년 넘게 살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지명들이었지만 ‘직주근접’이니 희망을 품을 만했다. 살기 좋은 동네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부동산 앱을 여러 개 가동하며 중개인들에게 연락했고 약속을 잡았다.
“사장님, 요새 전세 너무 귀해서 저희도 죽겠어요. 현금 얼마 보유하고 계시댔죠?” 레파토리처럼 반복되는 말들을 들어야 했다. 중개인들은 내가 말한 예산보다 높은 금액의 집을 먼저 보여준다. 마음에 들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대출 이자가 마음에 걸린다. 어느새 눈만 높아진 건지, 내가 가진 예산 안의 집들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 룸, 투 룸 생활에 지쳐 더 이상 좁은 집에 살고 싶지 않기도 하다. 번뇌하는 남의 속도 모르고 중개인은 재촉한다. “이거 진짜 바로 나갈 텐데? 가계약금이라도 걸어 두세요.”
선택을 미룬 채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근황을 나누던 중 이사 얘기가 나왔고, 친구는 반가워하며 자신의 동네인 인천 계양구를 적극 추천했다. 생각해보니 친구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은근히 가까워 놀란 적이 많았다. 한적하면서도 있을 건 다 있고 살기 좋아 보였던 모습도 생각났다. 서울에서 조금만, 내가 후보로 두었던 9호선 라인에서 살짝만 서쪽으로 벗어나면 그 지역인데 왜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뼛속까지 서울중심주의자인 스스로를 탓하며 다시 지도 앱과 부동산 앱을 켰다. 매물로 뜨는 곳들은 전세보증금이 서울보다 저렴하면서 평수는 넓었다. 그래, 탈서울이다!
“여기는 안심 전세 아예 없어요. 요새 전세가 너무 귀해서요 사장님.” 중개인들은 하나 같이 답했다. 허위 매물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의 전세 대출이 되는 집은 없는 것이었다. ‘역시 가진 게 없어서인가’ 자책하며 다시 앱을 보았다. 엄지 손가락을 당기며 좀 더 서쪽으로 향했다.
인천 서구. 공항철도 검암역 인근에 적지 않은 매물이 떴다. 이번에는 다짜고짜 지역 부동산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또 귀하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중개인은 모니터를 열심히 보더니 뭔가를 찾아낸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다시 집 보기가 시작되었다. 바로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주, 한 주 기다렸다. 어떤 날은 화요일에 전세 매물이 떴다고 연락을 받아서 목요일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는데 그 날 아침에 집이 나갔다는 답을 들었다. 정말 전세를 찾는 사람이 많기는 많구나 싶었다.
이 넓은 땅 위에 내가 살 곳이 아예 없진 않은지, 적당히 만족스러운 집을 찾아 냈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감내할 정도의 장점들이 있었다. 어쩌면 집 보기에 지쳐버려서 빨리 선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일에 바로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입금했다. 요즘은 주말에도 인터넷으로 확정일자를 받을 수 있어서 행정업무도 처리했다. 전세 대출 관련 서류도 모두 제출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사를 한 번 할 때마다 진이 빠진다. 강제로 어른이 되는 기분도 든다. 뿌듯함은 잠깐이고,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의 집’을 보며 새 집 인테리어를 상상하는 한편, 수시로 “전세 대출 안 나오면 어떡하지? 막판에 신용 대출 더 받았다가 이사 날에 뭔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계약금 다 날리고 거리에 나앉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아무튼, 탈서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이 부디 무사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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