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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유레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쓰고 싶다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3화
자신이 오역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하는 번역가는 행복하다. 구조가 완벽하게 분석되지 않았는데도 대충 의미를 끼워 맞춰 얼기설기 문장을 만들고도(아몰랑 번역이라고 한다) 거리낌이 없다면 번역가의 삶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2021.07.09)
2020년 7월 23일(목) 오후 1시 번역 계약서에 사인하고 한 달 뒤, 출판사로부터 세 가지 자료가 배달되었다. 번역 저본인 『유레카』가 포함된 영어판 『에드거 앨런 포 전집』 제9권, 「관찰, 추론, 상상: 에드거 앨런 포의 과학철학의 요소들」이라는 영어판 논문, 『에드거 앨런 포, 유레카,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영어판 단행본. 처음 들었던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번역하다 보면 원서 말고도 여러 자료를 참고해야 할 때가 있는데, 한국어판 단행본으로 된 자료는 도서관에서 빌리면 되지만 영어판 단행본과 논문은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예전에 출판사에서 내게 자료를 사준 적이 딱 한 번 있긴 했지만 다 읽고 나서 출판사에 반납해야 했기에, 그 뒤로는 그냥 내 돈으로 사서 소장하고 있다. 이런 실정이었으니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자료를 챙겨준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21년 6월 중순 크리스토퍼 해드내기의 『휴먼 해킹』(까치)을 퇴고하고 『유레카』를 펼쳐 든 지 일주일 만에 깨달았다. 내가 느껴야 했던 감정은 고마움이 아니라 원망이었다는 것을. 에드거 앨런 포가 사망 1년 전인 1948년에 발표한 『유레카』는 우주의 기원과 원리에 대해 독창적 이론을 펼쳤는데, 빅뱅 이론을 비롯하여 20세기 과학이 발견한 사실 아홉 가지를 예측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전해에 아내를 잃고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며 폭음에 빠져 지내다가 자신의 전문 분야와 동떨어진 과학에 대한 자칭 ‘희대의 걸작’을 쓴 것을 감안하면 문장을 해독하기가 녹록치 않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시험 삼아 일주일 동안 초견初見 번역을 해본 결과는 참담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직역하는 것을 ‘영혼 없는 번역’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름 붙인 행동을 나 자신이 하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원서를 덮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유레카』는 번역이 불가능한 책이었다. 데이비드 스테이모스가 『에드거 앨런 포, 유레카, 과학적 상상력』을 쓰기 전에는. 『유레카』는 포 생전에는 철저히 외면받거나 혹평받았고 사후에는 철저히 외면받거나 혹평받거나 오독된 걸작이었다. 포의 과학적 상상력은 시대를 훌쩍 뛰어넘었기에 당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었으며, 그의 시와 소설을 연구하던 문학 평론가들은 『유레카』를 독해하고 그 진가를 알아볼 능력이 없었다.
‘이 자료가 아니었다면 번역할 수 없었을 뻔했잖아!’라고 느낀 책은 『유레카』가 처음이 아니다. 찰스 다윈과 더불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개념을 처음 세상에 알린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말레이 제도』(지오북, 2017)도 『주석 달린 말레이 제도』가 아니었다면 번역하지 못했거나 영혼 없는 번역에 그쳤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포와 월리스 둘 다 빅토리아 시대(19세기 중후반)에 걸친 저자다. (『말레이 제도』는 1869년에 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50~170년 전에 출간된 책을 번역하는 데는 특별한 어려움이 따른다. 어휘와 문체뿐 아니라 세계관과 과학적 지식, 그리고 상식조차도 지금과 사뭇 달라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표에 인색한 장황한 문장들! 번역은 이해가 10이라면 표현이 90일 정도로 한국어 표현의 비중이 크다. 대개는 원문 자체야 모르는 단어와 숙어 몇 가지만 찾아보면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전문가적 지식이나 문화적 경험을 전제하는 문장,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문장은 표면상의 의미만 파악했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떤 문장들은 표면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조차 고역이다. 영어 문장을 번역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정보로는 대명사(지시대명사, 인칭대명사, 관계대명사)의 선행사, 각 명사구의 문장성분, 수식어의 피수식어 등이 있다. 구조가 정확하게 분석되었다면 영어 문장은 각각의 낱말이 잔가지가 되어 하나의 줄기로 수렴하는 수형도를 이루게 된다. 부러진 가지가 하나도 없어야 제대로 분석된 것이다.
자신이 오역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하는 번역가는 행복하다. 구조가 완벽하게 분석되지 않았는데도 대충 의미를 끼워 맞춰 얼기설기 문장을 만들고도(아몰랑 번역이라고 한다) 거리낌이 없다면 번역가의 삶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심지어 그런 문장을 유려하게 다듬을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어떤 문장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다행하게도) 그런 번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형도를 완성할 때까지 번역가는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골머리를 썩인다. 가장 두려운 것은 만에 하나 저자가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의 이 모든 수고가 헛수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씨앗을 마음속 한쪽 구석에 묻어둔 채 우공愚公처럼 흙을 나를 뿐. 번역가가 이 지독한 희망고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해답을 찾기 때문이다. 『유레카』의 경우는 두 주 동안 자료를 읽은 뒤에야 천천히 문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책이 진정으로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은 번역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자가 쓴 모든 문장이 어디선가 본 문장이거나 어디선가 본 문장의 조합이라면 번역은 기억을 되살리는 일에 불과할 테니까. 물론 이런 식의 번역은 빅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 번역 기계가 훨씬 잘할 것이다. 반면에 세상에 없던 문장을 만나면 번역가의 두뇌는 기하급수적으로 가지를 뻗는 경우의 수를 탐색해야 한다. 하나의 문장은 여러 수형도로 분석될 수 있고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 그중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려면 세상에 대한 지식과 문맥, 일관성을 총동원해야 한다. 포는 일관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선포했지만 번역가는 엉뚱한 길을 일관되게 걷다가 나중에 문장들을 모조리 뜯어 고쳐야 할 때도 있다.
포 또한 『유레카』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탐색한다. 그의 목표는 1848년까지 관찰된 천체의 운동과 현상, 몇몇 과학자들이 밝혀낸 법칙들을 설명해내는 하나의 거대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주라는 문장을 해독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번역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암호해독가 포가 책의 이름을 ‘유레카’로 지은 것은 우주라는 암호를 마침내 해독했다는 승리의 선언 아니었을까. 그리고 포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언젠가 나도 ‘유레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쓸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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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저/<노승영> 역32,40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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