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이는 부와 힘의 방정식
『패권의 대이동』 김대륜 교수 인터뷰
책에서 패권은 주로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한 나라가 특정 지역, 심지어 전 세계에서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로 썼습니다. (2021.07.08)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고 4차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패권의 대이동』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근현대 4대 패권국인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의 역사로 눈을 돌린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한민국 지식인들과 기업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패권의 비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년)에 공저로 참여한 김대륜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교수가 한 나라의 부와 힘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깊게 파고든다.
요즘 기사나 뉴스에서 기술 패권 시대니 미중 패권 경쟁이니 해서 ‘패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패권(hegemony)’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요? 힘(power)이라는 개념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우선 힘, 그러니까 권력이라는 개념은 패권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데요. 힘이란 어떤 때는 완력처럼 날 것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어 자기 의지를 다른 이에게 관철할 때 이용하는 무엇으로 쓰이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매력이나 카리스마처럼 내 의지에 다른 이가 자발적으로 동의하게끔 만드는 힘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패권은 주로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한 나라가 특정 지역, 심지어 전 세계에서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로 썼습니다. 패권국가는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 지상 권력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국제 관계를 자기 뜻에 따라 위계질서로 재편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요.
2017년에 출간되어 대한민국 지식인들과 기업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패권의 비밀』이라는 책에 공저로 참여하셨는데요. 그 책과 이번 책 『패권의 대이동』 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김태유 교수님과 작업한 『패권의 비밀』은 꽤 오랜 기간 토론과 집필을 거친 학술서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경제 성장이 감속하는 사회와 가속하는 사회에 대한 김태유 교수님의 이론 틀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틀에 비추어 주로 본문에 나오는 역사 이야기를 썼지요.
반면 『패권의 대이동』은 일반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교양서로 구상했고요. 더 중요한 차이는 이론 틀인데요. 『패권의 비밀』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세계사의 중요한 주제가 갖는 의미에 집중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이 ‘끝없는 혁신’이라는 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혁신이 일어나는 조건을 생각해봤어요. 거기에다가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한 나라가 패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필수조건으로 자본의 힘만 고려하지 않고, 견실한 재정체제를 갖추는 일, 다시 말해서 정치의 힘이 굉장히 중요했다는 점을 부각하려 했습니다.
책의 여러 부분이 흥미로웠지만 특히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항해 무려 80년간 전쟁을 치룬 뒤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이 인상 깊었습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 제국에 대항해서 독립을 선언한 일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경제체제, 그러니까 정치권력의 힘을 바탕으로 농민에게서 경제 잉여를 전유하는 체제에서 서서히 권력의 밑바탕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해가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지요.
네덜란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그러니까 돈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고, 돈을 버는 일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이들이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에 동원하는 재정자원을 동원하는 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장기공채 같은 혁신적인 제도를 고안해서 싼 이자로 큰돈을 동원하기 시작했던 일은 이런 정치사회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한편 봉건체제에 기반한 스페인 제국에서 세금을 내는 일이란 그야말로 경제 잉여를 국가가 거의 강제로 빼앗아가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차이가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지요.
사회 곳곳에서 4차 산업혁명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영국의 사례를 보면, 그저 민간에서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이런 생산성 혁신이 일어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혁신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거예요. 굳이 슘페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 이전 경제체제와 구별되는 핵심적인 특징이 혁신에 바탕을 둔 이윤 창출이라는 점은 기억할 대목입니다. 그런데 혁신이란 신자유주의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듯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에요. 물론 어떤 대목에서는 규제를 푸는 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 문화가 얼마나 한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돈을 버는 일과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돕는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가 여부이고요. 더 나가서 국가가 혁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책을 펴는 일도 중요해요. 산업혁명 시대 영국이 그랬고, 19세기 미국이나 독일이 다 그런 경우였습니다.
요즘 실제 체감하는 경기와는 별개로 금융 자산에 대한 투자 시장은 호황입니다. 이런 간극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패권의 역사에서 돌이켜볼 만한 사례가 있을까요?
역사를 보면 자산이나 금융 쪽에 돈이 몰리는 일은 장기적으로 경제의 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곤 했어요. 네덜란드 경제가 17세기 중반부터 활력을 잃기 시작할 때 갈 곳을 찾지 못한 돈이 투기로 몰렸고, 심지어 영국 쪽 주식시장에 몰렸던 일이 결국 영국 경제발전을 도와 네덜란드가 패권을 내주는 결과를 낳았어요. 영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19세기 후반에 귀족을 비롯한 상류계급이나 심지어 중간계급도 제조업이나 상업에 대한 투자보다는 런던 금융시장에 투자해서 투자 수익으로 편안하게 살아가기를 원했어요. 그걸 신사자본주의라고 불렀는데요, 그게 장기적으로 영국 패권을 뒷받침했던 제조업 생산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어요. 물론 네덜란드에서나 영국에서 금융업으로 경제 중심이 이동한 후에도 두 나라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고, 지금도 잘 사는 나라들이지만, 패권을 잃어가는 과정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지요.
이런 사례에 비춰볼 때 우리 사회에서도 자산에 대한 투자보다는 견실한 기업이나 새로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쪽으로 관심을 돌릴만한 인센티브를 주는 방법을 고민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간 이뤄놓은 성취를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국들 사이에 껴 있는 우리로서는 현재 진행 중인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중요한 이슈일 텐데요. 교수님은 이 둘의 갈등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간다고 보세요?
지금은 세계사의 흐름이 어떤 변곡점에 가까워지는 때인 것 같아요. 길게 보면 대략 1500년 무렵에 세계사의 중심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했는데, 그 흐름이 다시 아시아로 되돌아오는 길에 서 있는 것이지요. 패권 경쟁으로 보면 이 두 지역을 대표하는 두 대국이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어요. 저는 경제력뿐만 아니라 군사력이나 정치제도의 견고함과 안정성, 문화적 매력 같은 여러 차원에서 볼 때 미국이 한동안 중국에게 우위를 누릴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미국의 재정 상황이 걱정스러운 문제이긴 합니다. 1970년대 초에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이후에 미국은 사실 기축 통화를 마음껏 찍어낼 수 있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엄청난 수준의 재정 적자를 감당해 왔는데, 미국과 대결하려는 중국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우방국이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받아들이려 할지는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감염병 같은 변수가 패권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으며 코로나19 팬데믹이 앞으로의 세계 질서에 미칠 영향이 궁금합니다.
이 문제는 쉽게 답하기 어려워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감염병 사례는 아마 중세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 정도가 될 텐데요, 2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코로나 19 팬데믹이 흑사병 수준의 감염병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해요. 인구 가운데 감염된 사람의 비율로 따져보든 치명율로 따져보든 간에 말이지요.
그래도 흥미로운 점은 좀 보입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 가운데 바로 패권국가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미국이 코로나 팬데믹에 대항한 전 세계의 싸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 말이지요.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양극화나 인종 문제 같은 심각한 문제가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되었어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거버넌스가 전 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미국의 엘리트가 깊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해요. 앞으로 이런 팬데믹은 더욱 자주 일어날 것이고, 게다가 우리는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처방을 내놓고 세계를 이끌어가지 못한다면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누리고 있는 위상에는 상당한 균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김대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근대 영국사에 관한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원 초빙교수, 서울대학교 공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기초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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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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