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7월 우수상 - 나를 일으킨 제주 그리고 글쓰기
내 인생의 큰 전환점
내 나이 마흔, 나는 제주로 요양을 왔다. 요즘 유행하는 제주 한달 살기, 일년 살기가 아닌 치료를 위한 요양이었다. (2021.07.05)
내 나이 마흔, 나는 제주로 요양을 왔다. 요즘 유행하는 제주 한달 살기, 일년 살기가 아닌 치료를 위한 요양이었다. 사람마다 인생에서 ‘암흑기’라고 부를 만한 유독 힘든 시기가 있다고 한다. 삼십대의 후반, 나에게 그 첫 번째 ‘암흑기’가 찾아왔다. 유치원 교사였던 나는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야 했던 워킹맘이었다. 일 때문에 바쁜 남편,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양가 부모님들... 그 어떤 조력자 없이 엄마니까 해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버티며 워킹맘의 삶을 이어가던 나는 직장에서 더 큰 책임을 맡게 되면서 심리적 부담감이 커졌다. 이따금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가슴을 두드리며 억지로 숨을 몰아쉬어야만 가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공황장애였다.
남편과 상의 끝에 육아휴직을 했다. 몸은 휴식이 필요하다고 신호를 줬지만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육아휴직을 하고는 온갖 사교육에 관심을 가지며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다가 또 다시 공황 장애 증상과 우울증이 왔다. 나를 희생하고 갈아 넣으며 워킹맘의 삶을 이어가다 첫 번째 번아웃이 왔고 비난하던 유아 사교육에 올인하다가 두 번째 번아웃이 왔다. 아이러니한 두 번의 번아웃은 어쩌면 무엇이든 지나치게 열심히 하다가 금방 에너지를 소진해 버리는 나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이를 최고로 키우고 싶은 나의 욕심과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도시에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시골 살이를 찾아보던 중 그나마 남편이 오가기 쉬운 제주로 가게 되었다. 제주도의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간 나는 분교에 아이를 입학시키고 아이를 사교육에서 벗어나 흙냄새 풀냄새 바다 냄새를 맡으며 자유롭게 뛰어놀게 해주었다. 나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날씨가 좋으면 바다가 보이는 해녀촌에서 낮부터 맥주를 들이켰고 골프, 서핑, 승마, 발레 등 평소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들로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그리고 작은 분교의 학부모 동아리 회장까지 하며 하루를 이틀처럼 사는 기염을 토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지만 나는 사실 제대로 쉬는 방법을 몰랐고 마지막 남은 에너지들을 쥐어짜면서 또 하루를 최선을 다해 불태우고 있었다. 마치 전등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그렇게 제주 생활을 끝내고 나는 다시 도시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놓고 떠난 제주 살이였기에 제대로 내 마음이 치유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돌아온 도시는 마치 지옥과 같았다. 거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빽빽한 아파트는 창살 없는 감옥 같았고 회색빛 도시의 삭막한 겨울 풍경은 내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나는 또 웃음을 잃었고 무기력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제주 앓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의 병은 깊고 심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시국은 더욱 심해졌고 나는 다시 출근을 하게 되었지만 내 아이들은 학교와 유치원에 가지 못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동동거렸다. 출근길에 차에서 울다가 겨우 눈물을 닦고 출근했다. 근무하는 내내 아이들 걱정에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하며 동료들의 눈치를 봤다. 점점 한계에 치닫는 나날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시점에 다다랐고 또다시 육아휴직을 했다. 육아 휴직이 도망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내 자신이 한심했다. 무책임한 나를 비난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은 더욱 깊어졌다.
휴직 후 매일 같이 누워있고 수시로 울었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은 다시 제주에 가서 요양을 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단, 작년처럼 넘치게 즐기는 제주가 아닌 쉬고 치유하는 제주 살이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결국 나는 구겨진 휴지처럼 다시 제주로 돌아갔다. 당시 뉴스에서는 제주에 48일째 '역대 최장 장마'가 지속 되고 있다고 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비가 내렸고 나를 둘러싼 공기는 습하고 눅눅했다. 장장 48일의 장마 동안 내가 살던 마을은 수장된 마을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나는 깊은 우울감이 견딜 수 없게 무거웠다. 찰랑찰랑 넘칠 듯 아슬아슬한 물잔처럼 내 눈물샘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 몰랐다. 나는 매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선생님 앞에서 봇물 터지듯 원망과 슬픔의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시원한 감정이 아닌 또 다른 슬픔의 시간이었다. 말로, 눈물로 아무리 쏟아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우울과 슬픔은 계속 차올랐다. 약을 먹어도, 상담을 해도 우울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미치도록 치유되고 싶었고 이 구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아티스트웨이” 라는 책을 읽고 매일 아침 하얀 노트에 3쪽씩 아무 글이나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줄도 쓰지 못해 멍하니 흰 종이만 바라보기도 하고 같은 단어로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기도 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쓰다 보니 엄마에 대한 원망, 남편에 대한 서운함, 육아에 지친 나를 위로하는 글들로 나의 모닝 페이지 노트는 채워지고 있었다. 울면서 글을 쓴 날도 많아서 군데군데 눈물로 얼룩지고 종이가 울퉁불퉁해지기도 했다. 기나긴 장마가 온 제주의 여름을 그렇게 글로 나를 풀어내며 보냈다.
글을 쓰는 동안 여름의 열기는 한풀 꺾였고 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이 느껴지며 가을이 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도, 나의 우울도 서서히 막을 내렸다. 가을이 한가운데에 왔을 때 한 권의 노트가 완성되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비밀 노트, 내 아픔의 상처를 글자들에 새겨 넣은 눈물의 노트였다. 어쩐지 나는 조금 힘이 나기 시작했다. 당장 나아진 건 없었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온 것 같은 안도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말로는 풀어지지 않던 나의 감정들이 글로 풀어지면서 내 마음속의 응어리들도 하나둘씩 풀어져 갔다. 어두웠던 마음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자 몸에도 에너지가 점점 차올라 산책도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친구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햇빛을 보며 한 두시간씩 올레길을 걸었고 건강식을 챙겨 먹고 꾸준히 다양한 글쓰기를 하면서 마음을 다잡아 나갔다. 글쓰기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진정한 쉼을 즐기게 된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지금, 글쓰기를 친구삼아 평범한 삶의 감사함을 알면서 살아가고 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암흑기가 내 인생의 반환점이 되어 나는 나이 마흔에 진짜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다른 사람의 기준을 내 기준으로 삼아 조바심 내던 아이 같았던 내가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오면서 나의 내면을 돌볼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다가오는 내 삶들에 또 다른 암흑기가 오더라도 이제는 그리 겁나지 않는다. 힘든 나를 돌봐주고 위로해줄 멋진 “글쓰기”라는 친구가 있으니까.
서정금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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