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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정부 지원과 한국문학
<월간 채널예스> 2021년 7월호
근본적으로는 철학의 문제다. 나는 적극적 복지에 순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배고픈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고, 노약자와 장애인이 건강한 젊은이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2021.07.05)
밤에 혼자 글을 쓰며 데뷔를 꿈꿀 때, ‘소설가가 된다면 이런 일들을 하거나 겪고 싶다’며 바랐던 일들이 있었다. 독자와의 만남 갖기, 문예창작학과에서 강의하기, 문학상 응모작 심사하기, 영화 판권 팔기……. 개중에는 좀 이상한 로망도 있었는데, ‘창작의 고통으로 정신이 피폐해지기’라든가 ‘정부의 탄압 받기’ 등이었다.
이후 몇 년 동안 놀라운 행운이 이어진 덕분에, 나는 그 일들을 결국 다 경험하게 됐다. 그리고 상당수 소망이 실제로 이뤄지면 그다지 소망스럽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문학상 심사위원은 극한 직업이었다. 길지 않은 기간에 장편소설 원고를 수십 편 읽어야 했는데,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 우울증은 다시는 앓고 싶지 않다.
정부의 탄압은, 음……, 이건 사실 내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박근혜가 탄핵된 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열심히 조사해서 발표해준 덕분이었다. 진상조사위가 출범하도록 힘을 모으고 그 안에서 민간 위원으로 활동하며 노력하신 선후배 예술인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몇몇 지원 사업에서 배제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지. 처음부터 ‘얘는 빼라’는 지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심사표를 조작해 적격 판정을 부적격으로 바꾼 사례도 있었다. 정말 쪼잔하고 유치하다. 치사하고 기괴한 정권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엄청난 분노가 치솟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일단 내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입은 불이익이고, 또 그런 피해에 ‘블랙리스트’나 ‘정부의 탄압’ 같은 말을 써도 될지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이전까지 내게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출간 금지였다. 그리고 어느 작가가 정부로부터 탄압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끌려가서 두들겨 맞거나 고문을 당하는 일을 연상했다. 『순이 삼촌』의 현기영 작가처럼. 나는 마광수, 장정일 작가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두 분 모두 징역을 살았다.
그에 비하면 알지도 못했던 지원 사업에서 배제되어 입은 손실은 솔직히 하찮다. 정부가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면 고맙지만 그런 도움을 받는 게 작가로서 나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 정부 지원에 정치적 개입이 이뤄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당위와 별개로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말살하는 행위”(더불어민주당 대변인)라든가 “문학의 존재 근거를 흔드는 것”(한국작가회의 대변인) 같은 말을 들으면 좀 머쓱했다. 그대로 넘기면 결코 안 되는 불의이고, 그런 표현이 나온 앞뒤 맥락도 있지만, 그래도 머쓱하다. 내 영혼은 아직 멀쩡하다.
그 즈음부터 문학계나 문인단체의 레토릭에 신경을 쓰게 됐다. 정부의 지원 사업과 관련된 문제가 되면 우리의 워딩은 너무 당당하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비굴했다. 정부는 당연히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굶어 죽는다는 식이었다. 그런 때 지원의 이유로 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보는 기분은 착잡해진다.
예를 들어 올해 4월 문학계 5개 단체가 낸 공동성명이 그렇다. 정부의 추경 예산 편성에서 문학계 지원이 적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성명서의 한 문장은 이렇다. ‘문학에 대한 이와 같은 홀대는 그동안 한국 정신문화의 기저를 지탱해온 문학 생태계의 궤멸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성명서가 나온 배경을 이해한다. 한국문학의 한 구성원으로서, 한국 정부가 많은 문인들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바란다. 하지만 시 쓰고 소설 짓는 자들에게 설사 벌금을 매기더라도 한국문학이 궤멸하지는 않는다. 그게 문학의 힘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그래도 정치사회 영역에서 한국문학의 영향력이라는 게 남아 있으니까, 정부도 이런 요구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언젠가부터 정부의 지원이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이제는 한국문학과 지원금이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 분리되기 어려워 보이기까지 한다.
늘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30여 년 전 정부가 문예지의 사업계획서를 받아 작품을 발표할 예정인 작가에게 지원금을 주려 했을 때, 문학출판사와 작가들의 반응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1990년 8월 9일자 『시사저널』에 실린 어느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문예지들이 분발해서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 떳떳하다. 작가가 왜 국민의 세금을 받아야 하는가.”
산업으로서 문학 출판이 쪼그라들면서 그런 기개도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예술 지원 사업과 예술인 복지 사업이 섞였고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요즘 정부의 문학 지원 사업들을 보면 고심의 흔적이 읽힌다. 문인들을 지원하고 싶은데 그냥 현금을 쥐어줄 순 없고, 납세자들에게 혜택이 가는 방향으로 줘야겠다며 이것저것 일을 시키는 모양새다. 안타깝게도 그러다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근본적으로는 철학의 문제다. 나는 적극적 복지에 순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배고픈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고, 노약자와 장애인이 건강한 젊은이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배고픈 예술인과 배고픈 비예술인도 구분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직업에 관계없이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창작 지원에 찬성한다. 거기에 더해 많은 예술인이 프리랜서로 일하니 고용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특수성을 더 살펴봐주면 좋겠다. 반면 자기부담금 없는 예술인 연금 같은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누구나 웹소설 플랫폼에 글을 올려 작가 호칭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예술인의 자격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국가가 그 기준을 정하는 게 바람직한가?
위에는 이런 고차원의 딜레마가 있고, 아래에서는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힌다. 그러다 보니 문화 지원 정책이라는 게 실행된 결과물을 보면 비판점들이 늘 여러 각도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 사업을 추진하는 공무원들도 참 답답할 것이다. 나는 최근에 국립한국문학관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꼈다.
고백하자면 나는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에 거의 내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미술 작품이나 역사 유물은 원본이 중요하며, 그 원본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볼 수 있다. 반면 시를 제외한 문학 작품은 대개 혼자 개인적인 장소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감상한다. 그 감상에 원본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문학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미술관이나 박물관만큼 목소리를 높이기 어렵다. 문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문학관보다 도서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전국에 문학관이 100곳 넘게 있는데 다 잘 운영되는 건 아니다. 한국현대문학관도 있고 한국근대문학관도 있는데 국립한국문학관이 또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게다가 사업이 추진되는 방식이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어느 기업이 공장을 짓는다 치면 먼저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지 따지고 다음에 그 내용물에 어울리는 부지를 정해서 예산을 추산할 것이다.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은 정확히 그 반대의 순서로 진행됐다. 먼저 600억 원이라는 숫자가 발표되고 다음 부지 선정에 들어갔다.
그러자 전국 24개 지자체가 신청을 했고, 경쟁 과열로 공모를 중단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문학진흥정책위원회는 용산가족공원을 최적 후보지로 발표했지만 서울시가 반대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은평구로 결정이 났다. 그렇게 부지를 정한 뒤에야 문학관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다 「국립한국문학관 건립 기본계획」 연구용역 보고서를 구해 읽고 자세를 달리하게 됐다. 적어도 보고서 작성자들이나 그들에게 조언한 문학계, 출판계 전문가들은 나와 문제의식이 같았다. 다들 알고 있구나. 그런데, 그래서, 보고서의 내용은 때로 자기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국립한국문학관이 시민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 유리 상자 속 희귀본을 관람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런 대목을 읽으면 계속 자문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은평구가 아니라 용산구에 지어야 했던 것 아닐까? 애초에 필요한 건 커다란 문학관이 아니라 작은도서관 사업 확대 아니었을까?
나는 한국문학에 대한 보고서의 진단에 동의했다. 보고서는 한국문학이 위기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를 ‘문학의 기반은 대중인 일반 독자층인데 현재 한국문학이 독자들로부터 유리된 채 고립되어가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므로, 국립한국문학관이 한국문학과 독자를 가깝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만 동의했다.
과연 어떤 기관이나 건물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건 결국 작품만이 해낼 수 있는 일 아닐까. 한국문학의 위기는 작가들이, 독자와의 만남이나 유튜브가 아니라, 작품으로 돌파해야 한다. 이 역시 문학의 힘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 소설들이 뜨거운 호응을 얻은 것도 작품이 독자들의 삶에 다가간 덕분이었다고 본다.
이쯤에서 ‘산업재해로 숨지는 사람이 매일 2.5명씩 나오는 나라에서 왜 문학상 수상작 중에 중대재해가 소재인 작품은 찾기 힘들까’ 하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답은 간단하다. 너도 안 썼고 나도 안 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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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