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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가끔은 좋은 일도 있다] 초보 채식주의자
<월간 채널예스> 2021년 7월호
채식은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앞으로 내 식생활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나는 상당히 즐겁다. 그리고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쁘다. (2021.07.05)
채식을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채식 지향으로 식단을 꾸려보기로 했다. 사실 지금까지 채식에 대해 의식한 적은 많았다. 비건 친구도 많았고, 환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몇 번 보았다. 기사도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내 인생에 바로 적용하고 싶진 않았다. 고기와 나는 감정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허하면 뭔가를 시켰다. 주로 배달 음식이었다. 치킨을 시키고, 족발을 시키고, 잘 구워진 삼겹살을 시켰다. 넝마가 된 마음으로 즐거운 영상을 틀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입안에 음식을 넣는 것이 좋았다. 이 험난한 세상에 가장 확실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종목은 고기였는데 이런 감정은 ‘풀때기’로는 풀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힘든 일정을 마쳤을 때, 힘든 일정이 아직 진행 중일 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금요일 밤이니까, 핑계는 너무 많았다. 그러다 몸이 허하면 삼계탕이나 설렁탕을 먹었다. 그걸 관두라니. 그럼 난 어디서 안식을 찾아?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든데 고기까지 끊으라고?
변화는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찾아온다. 나는 어느 잠 안 오는 새벽, 예스24 북클럽을 뒤지고 있었다. 잠을 달아나게 하지 않을 정도의 평온한 책을 찾고 있다가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보선 작가의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 보았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덤덤히 페이지를 넘겼고 다 읽은 순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만 먹어야겠다.
사람마다 계기는 다를 것이다. 나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팩트는 이것이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2011년에 미국에서 생산된 항생제의 80% 이상이 가축에게 투여되었다고 한다. 가축용 항생제가 아닌 전체 항생제 생산량의 80%이다. 얼마나 나쁜 환경에서 키우길래 그렇게나 많이 약을 써야 할까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닭을 키우고, 도축하고, 살을 정리하고, 치킨집에서 그 고기를 사서, 조리하고, 기사가 그걸 픽업해서 우리 집에 배달하는 모든 과정에 내가 2만 원만 지불하면 된다니. 그 단가를 맞추려면 어딘가를 쥐어짜야 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저렴함과 간편함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채식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고 들었다. 고기, 해산물은 물론, 유제품에 심지어 꿀까지 먹지 않는 비건이 있고, 그냥 붉은 고기만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단계’라는 말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 말은 상위 단계와 하위 단계가 있다는 뜻 같은데, 그렇다면 상위를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시작 전부터 기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단계에도 속하지 않는 ‘그냥 나의 채식’을 시작하기로 했다. 즐겁게, 맛있게, 지속 가능하게. 이 여정이 고기의 기쁨을 억제하는 것이 아닌, 채소의 기쁨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 되길 바라며.
다음날 동거인도 책을 읽었고 다행히 뜻이 맞았다. 우리는 오랜 시간 냉장고에 소중히 붙여 두었던 푸라닭 쿠폰 10장을 동네 친구에게 넘겼다. 굉장히 진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소심하게 접근을 시작했다. 과연 비건 빵은 맛있는가. 새우나 닭가슴살이 없는 샐러드는 허전하지 않은가. 비건 버터의 맛은 어떤가. 우유 대신 아몬드 브리즈를 넣은 라떼는 맛이 좋은가. 시도해보니 모두 그냥 맛있었다. 어딘가 허전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매일 초코두유가 너무 맛있어서 한 박스 쟁였다. 다음은 된장찌개. 과연 차돌박이나 조개 없이 끓인 된장찌개가 맛이 날까. 아니, 또 그냥 맛있었다.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럼, 채소의 가능성을 더 넓혀보자. 오일 파스타는 어떨까. 제철이라 물이 오른 애호박과 가지를 주인공으로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보았다. 평소 같으면 반드시 새우를 넣었을 조합이다. 한 그릇 싹 비웠고 마지막 한 입까지 맛있었다. 허, 신기하네. 그럼 이번엔 중식. 마파두부를 만들어보자. 파 기름을 내고, 다진 마늘, 두반장, 고추기름, 산초 등을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살짝 데친 두부를 넣고, 마지막으로 언리미트 민스 대체육을 넣었다. 나는 대체육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종이 씹는 느낌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한 입 먹고 이럴 수가. 여기까지 세상은 발전했구나. 나는 언리미트를 두 팩 더 주문했다. 잘 익은 토마토와 양파와 오이를 발사믹 식초에 마리네이드 해보았다. 채소는 이렇게까지 맛있을 수 있구나. 나는 내 입에 무엇이 들어가고 있는지를 예전보다 훨씬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생의 좋은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감각과 닮아있었다.
채식은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앞으로 내 식생활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나는 상당히 즐겁다. 그리고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쁘다.’너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라는 말을 최근 만난 모든 사람에게 들었다. 채식 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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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음악가. 책 <익숙한 새벽 세시>, 앨범 <3>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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