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대의 기록법] 하현, 일상에 ‘브이로그’ 필터를 입히면?
요즘 세대의 기록법 1편
글쓰기는 나를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으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아를 되찾는 기분이 들어요. (2021.06.28)
브이로그를 왜 볼까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저 남들처럼 아침을 먹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는 일상을 왜 사람들은 좋아할까? 그리고 문득 습관적으로 브이로그를 보는 나를 발견하고 느꼈다. 평범한 일상을 잘 보여주면, 누군가에게 위안과 휴식이 되는구나.
하현 작가의 에세이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는 마치 섬세한 감정이 흘러가는 감각적인 브이로그 같은 책이다. 그는 자신을 ‘실내형 인간’이라 소개하며, 약속이 취소됐을 때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혼자 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16쪽)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애매모호하지만, 하현의 글을 만나면 또렷해지는 일상의 기분들.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포착하는 하현 작가는 어떻게 하루를 기록할까? ‘실내형 인간’인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각자의 방에 있지만 마음을 나눈 듯한 다정한 답장이 돌아왔다.
작가님의 글은 일상을 스쳐 가는 감정들로 이뤄진 섬세한 ‘브이로그’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평범한 일상이지만 순간의 기분이 반짝이며 흘러가는 느낌이더라고요.
그런 느낌이 든다니 신기해요. 실제로도 브이로그를 좋아하거든요. 평소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편인데 대신 그만큼 유튜브를 봐요. 거의 중독에 가까운 수준으로요. 굉장히 다양한 채널을 구독하고 있지만 가장 즐겨 보는 건 일상 브이로그예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아서 아무리 봐도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브이로그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저절로 마음이 가요. 제가 생각하는 제 글의 장점도 그래요. 특별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들려주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 그래서 저와 비슷한 결을 가진 분들에게 조금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중, 고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써오셨고, 싸이월드도 열심히 활동하셨다고요. 취미라도 이렇게 길게 하기가 힘든데, ‘일상의 글쓰기’를 이어온 원동력이 궁금했어요.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글쓰기를 글쓰기로 여기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원동력이었어요.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면서도 그게 글쓰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저에게 일기는 그냥 일기였거든요. 워낙 말수가 적고 말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이라서 마음속에 늘 하지 못한 말이 쌓여 있었어요. 혼자 조용히 일기를 쓰고 있으면 가장 안전한 공간에 가장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만약 그게 글쓰기라고 생각했다면 금방 흥미를 잃었을지도 몰라요. 지금도 ‘자, 글을 써보자!’라고 생각하면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막막해지는데 ‘자, 일기를 써보자!’라고 생각하면 할 말이 끊임없이 떠올라요.
‘자, 일기를 써보자!’라고 생각하면
할 말이 끊임없이 떠올라요.
독자를 향한 글쓰기의 시작은 인스타그램이었죠.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을 통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엔 주변의 관심을 받는 게 무척 좋으셨다고요.(웃음)
인스타그램이 사진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이라서 오히려 더 좋았어요. 저처럼 계획적이지 못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텍스트 기반 플랫폼은 심리적 장벽이 높았거든요. 블로그에 게시물을 하나 올리려면 적어도 글을 열 줄은 써야 할 것 같잖아요. 하지만 인스타그램에는 딱 한 줄만 써도 전혀 허전하거나 어색하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이 플랫폼이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저는 관심을 받으면 고장 나는 극 내향형 인간인데 진짜 나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숨어 있고 오직 내가 쓴 글만 관심을 받으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세상에, 이렇게 안전하게 셀럽 놀이를 할 수 있다니!(웃음)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다양한 해시태그로 기록을 해나가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의 특성상 이미지도 중요할 것 같고요. 다양한 계정들 틈에서 주목받는 것도 중요하죠.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기록 활용법을 알려 주신다면요?
저는 직접 만든 해시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독서에 대한 기록에는 ‘#하현책방’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1인가구로 살며 겪는 일에 대한 기록에는 ‘#1인가구가장일기’라는 해시태그를 다는 식으로요. 검색에 걸리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것보다는 셀프 아카이빙에 대한 욕심이 더 커요. 나만의 해시태그를 만드는 건 새 노트를 사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 노트에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 가는 게 뿌듯하고 즐거워요. 가끔 해시태그를 검색해 그동안 올린 게시물을 역순으로 다시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핸드폰을 붙잡고 있어요.
1년 동안 단 한 편의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는 슬럼프 기간 동안, 김이슬 작가님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 결과물이 『우리 세계의 모든 말』로 출간됐죠. 글쓰기 슬럼프를 돌파한 방법이 이렇게 참신하다니요!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이 컸어요. 아무리 친한 친구와 함께라고 해도 조별과제는 질색이거든요. 혼자였다면 바로 결정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서로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게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작업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함께라서 좋은 점도 많더라고요. 그중 하나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둘 중 하나가 중간에서 포기해버리면 나머지 하나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버리니까요. 그게 단순한 책임감이었다면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슬럼프를 돌파하는 열쇠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우리를 잊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보험을 드는 마음과 미용실의 스몰토크 등 일상의 소재이지만 작가님이 포착하면 새로워지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매일 10문장 글쓰기 수업’을 하시기도 하셨죠. 매일 글감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 같은데, 비결이 있나요?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부분 그렇겠지만 제 일상 역시 매일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거든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반복 속에도 크고 작은 새로움이 있어요. 오랜만에 머리를 잘랐다든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든가 하는 것들처럼요. 그 순간을 잘 포착해 기억하고 있으면 언젠가 그때의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이야기가 되기도 해요. 물론 연습이 필요하지만요. ‘매일 10문장 글쓰기’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런 부분이에요. 이게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에 일단 열 문장이라도 써 보는 거죠. 그걸 반복하다 보면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글에는 ‘아직 뚜렷해지지 않은 마음’이 기록되어 있어서 공감이 돼요. 무대 위의 하이라이트 조명보다, 책상 위 희미한 조명등을 켜주는 것 같고요. 작가님이 이런 “평범함 뒤에 숨겨진 노력”을 기록으로 끌어올리는 이유가 있나요?
학교에서 영화를 배웠어요. 저희 학교는 예술대학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노력보다 재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수업에 매번 늦고 결석해도 결과물만 좋으면 교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는 일이 빈번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20대 초반을 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요.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대단한 걸 만들지 못하면 전부 소용없어. 그렇게 20대 내내 스스로를 많이 미워했어요. 제 노력이 미련하게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30대가 되고 나니 평범함 뒤에 숨겨진 노력의 가치를 조금씩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에는 그 시절 열심히 미워했던 나에게 화해를 청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 많아요. 후려치기 바빴던 내 노력을 이제라도 인정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 시절 열심히 미워했던 나에게
화해를 청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 많아요.
모든 ‘글쓰기 노동자’의 숙명일 것 같은데요. 독자들이 좋아해 주는 글의 모습과 작가님이 써나가고 싶은 글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있나요?
그런 고민은 늘 있어요. 특히 저처럼 SNS를 통해 ‘독자를 향한 글쓰기’를 처음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 그럴 거예요. 처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다는 욕심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반응이 좋은 따뜻하고 다정하고 감성적인 글을 열심히 흉내 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이걸 정말 내 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아름다운 문장보다 재미있는 말장난을, 감동이나 위로보다 유머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야 오랫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가장 단순한 질문이에요. 작가님의 삶에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글쓰기는 나를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잖아요.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으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아를 되찾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시간을 통해서만 충전되는 에너지가 있어요. 꼭 책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해요.
◈ 기록을 즐겁게 하는 아이템
아끼는 필기구들. 어려서부터 각종 필기구를 모으는 걸 좋아했어요. 용돈을 받으면 문방구에서 다 썼죠. 모든 작업을 노트북으로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 아이디어 메모는 언제나 손으로 해요. 가끔 너무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커터칼로 연필을 깎기도 해요. 그러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 Writer's Playlist
1. The Volunteers – Summer
백예린의 목소리를 사랑해요. 이 노래 덕분에 가장 싫어하는 계절인 여름에 대한 미움이 조금 옅어졌을 정도로요. 새벽에 글을 쓰다가 이 노래를 들으면 청춘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전주만 들어도 설레는 곡이에요.
2. The Velvet Underground – After Hours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를 쓰는 동안 제일 많이 들었던 노래예요. 파티에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부럽지만 막상 그 파티에 초대되면 문을 닫아걸고 혼자 있고 싶다는 내용의 가사가 너무나도 제 마음 같아요. 귀여운 멜로디와 무심한 목소리의 조화가 무척 사랑스러워요.
3. Land of Peace – Thank you, see you tomorrow
문득 글쓰기가 너무 외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 좋아하고 응원하는 동료 작가들을 떠올리며 듣는 노래예요. 영어로 계속되던 1절이 끝나고 2절이 시작될 때 “안녕 잘 지내? 그냥 한번 물어봤어”라는 한국어 가사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특히 좋아해요.
4. 아이유 – 내 꿈은 파티시엘(‘꿈빛 파티시엘’ 주제곡)
여러 사정 때문에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와 『우리 세계의 모든 말』 작업을 동시에 마무리해야 했는데요, 두 권의 책을 일주일 간격으로 출간하는 건 처음이라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그냥 다 포기하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면 이 노래를 틀어 놓고 혼자 따라 불렀어요. 정작 ‘꿈빛 파티시엘’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어서 소개하기 조금 민망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희망찬 노래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찾는 곡이에요.
5. 김목인 – 뮤즈가 다녀가다
저는 음악을 들을 때 멜로디보다 가사에 집중하는 편이라서 한국어로 된 노래를 들으면서는 글을잘 쓰지 못해요. 하지만 이 노래는 예외예요. 가사가 또박또박 들려도 그게 방해가 되기보다 오히려 용기가 돼요. 하루 종일 반복 재생해도 질리지 않는 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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