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 “이것은 시에 대한 동경을 담아 쓴 소설”
장편소설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재미있잖아요. 시가 재산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혹은 부유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2021.06.18)
50년 전 이탈리아에서 독립한 이오니아 해의 작은 섬나라 ‘삼탈리아’. 시를 사랑하는 요리사 ‘이원식’이 삼탈리아에 밀입국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은 이원식이 삼탈리아에서 겪는 기상천외한 일들과 그가 삼탈리아에 가기 전 한국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병렬로 이어진다.
『예테보리 쌍쌍바』 이후 7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한 박상 작가는 오래전 썼던 단편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에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시가 재산이 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고 난 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소설 써야지 생각했다. 이 소재는 꼭 쓰고 넘어가야 했던 이야기였다”는 박상 작가는 이 소설에 “시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했다”고 밝혔다.
“13년 동안 신춘문예에 시를 냈는데 다 떨어졌어요. 14년차에 소설을 내봤는데 됐죠. 주인공 이원식의 시에 대한 짝사랑과 갈망은 다 제 것이에요. 심지어 그가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도 과장하긴 했지만 제가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담은 거예요.(웃음)”
원래 작가님이 생각했던 제목은 ‘삼탈리아 빈티지’였다고요.
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제목으로 하면 망한다고 해서 포기했죠.(웃음) 편집자 님과 상의할 때도 끝까지 제안을 해봤어요. ‘삼탈리아 빈티지 레시피’로 가자고요. 반응은 냉랭했어요. 사실 ‘복고풍’보다는 ‘빈티지’에 방점을 찍고 소설을 썼었거든요. 지금의 제목을 정한 후에 내용도 약간 수정을 해야 했어요. 빈티지란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 같은 것인데요. 복고풍이라는 말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지금의 제목에 만족합니다.
작품의 배경은 가상의 섬나라 ‘삼탈리아’예요. 이곳은 ‘시(詩)’가 화폐처럼 통용되는 곳이죠.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2009년 발표한 첫 단편집 『이원식 씨의 타격 폼』에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라는 단편이 있었어요. 시 내놓으라는 강도에게 시는 없다고 하니까 “그럼 써”라기에 시를 쓰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이야기인데요. 거기서 확장을 시킨 거죠. 그보다 처음에 했던 상상은 시가 재산이면 얼마나 좋을까, 였고요. 책장에 시집이 100여 권 꽂혀 있는데요. 어느 날 이게 다 돈이면 얼마나 좋을까(웃음) 싶더라고요. 시가 워낙 소비되지 않는, 동시에 쓰기는 아주 어려운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잖아요. 이걸 돈으로 치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게 처음의 구상이었어요. 재미있잖아요. 시가 재산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혹은 부유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거기에 결국 제 소설은 탐미주의라 시의 아름다움과 결합시킬 수 있는 것으로 요리를 함께 이야기해봤어요.
이융희 문화연구자가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문학이 이 세계에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 끝없이 모색한 결과"(359쪽)라고 썼어요.
해설에서 “서사가 서정에 바치는 신실한 사랑가”라고도 써주셨는데요. 그걸 읽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쓰는 것은 서사고요. 비슷하면서도 반대되는 개념이 결국 서정이에요. 제목에 서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 역시 제가 시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거든요. 시로부터 받은 감상을 서정이라고, 폭넓게 해석해본 것이죠. 저는 시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잘 쓰지도 못해서 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요. 그 동경을 담아 쓴 이야기예요. 게다가 친구인 시인들이 이 얘기를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상상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이만한 게 있을까, 생각해요.
실제로 발표된 지금 한국문학의 시들을 인용했잖아요. 작품 인용을 모두 허락받았다고요?
네, 제가 직접 연락한 시인도 있고요. 출판사에서 연락해준 시인도 있어요. 그 과정이 제일 무서웠어요. 안 된다고 어떡하나 싶더라고요. 그러면 내용을 다 바꿔야 하잖아요. 다행히 대부분 허락해주셨어요. 시의 울림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 시도 넣어보고, 저 시도 넣어보고 많이 했거든요. 혹은 그 시를 꼭 넣기 위해 앞뒤 스토리를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어떤 시는 넣었더니 이야기와 딱 떨어졌어요. 정말 희열이 느껴졌죠. 이런 시가 나를 위해 존재했구나, 이 장르를 위해 존재하는구나(웃음) 싶어서요. 독자 분들이 이걸 읽고 시집도 좀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소설 안에 소설가가 메타적으로 직접 등장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어요. 깜짝 놀랐어요.
적절한 타이밍에 한두 번 메타적으로 등장하면 괜찮은데 여기저기 소설가가 막 드나들면 없어 보이잖아요. 제가 등장한 것은 변명이 필요해서였어요.(웃음) 허연 시인의 시를 인용한 부분은 실제로 그 부분을 시인에게 통째로 보여주고 허락을 구하기도 했는데요. 직접 만나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소설 안에 살짝 남겨놓으면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변명 차원에서 메타적으로 들어간 거고요. 그밖에 제가 등장한 장면은 반드시 웃기거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남겨둔 부분은 그나마 괜찮은 것 같은데 원래는 훨씬 더 많았거든요. 많이 뺐어요.
그런데 만약 허연 시인이 이 빌어먹을 소설을 읽는다면 자신의 아름다운 시가 이 따위 장면에 등장하는 걸 얼마나 불쾌해할지 심히 걱정되었다. 아마 에밀리를 민사재판에 고발하겠지? 이 글을 쓴 박상 작가와 SNS 팔로우도 끊어버리겠지? 나는 마음이 다급해서 비문을 썼다.(130쪽)
이번 소설에도 작가님의 소설에 종종 등장했던 이름 ‘이원식’이 등장하죠. 2014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원식이라는 이름이 어디에나 잘 어울려요”라고, 자주 사용하는 이유를 밝힌 적도 있어요.
『예테보리 쌍쌍바』 주인공 이름은 ‘신광택’이었는데요. 그건 세차장이 배경이었거든요. 거기에는 ‘이원식’이 왠지 안 어울렸어요. 이번 소설에는 시를 좋아하는 요리사가 주인공이죠. 이름을 하나 지어야겠는데 안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원식이라는 이름을 넣어보니 또 잘 맞았어요. 그냥 쓰던 이름 쓰자, 생각했죠. 제가 작명을 못해서 그런 거예요. 워낙 친근해진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제 제 소설에 이원식이라는 이름이 안 나오면 이상할 것 같아요.
말씀처럼 주인공 이원식은 시를 사랑하는 요리사예요. 요리하는 모습, 주방 풍경이 실감나던데 작가님의 경험이 많이 담긴 거죠?
주방 풍경은 제가 했던 일들 위주로 많이 묘사했는데요. 라멘집에서 약 6개월 일한 적이 있어요. 육수를 저어가며 직접 만들어봤으니까요. 다만 그 경험을 그대로 쓰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양자역학을 엮어서 써본 거예요. 그런데 양자역학은 너무 어렵더라고요. 어디까지 써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쉽게 풀이해둔 자료를 봐도 이해가 안 돼서요. 그냥 썼어요. 실제 과학 이론과 하나도 안 맞는다고 생각하시면 딱 맞아요.(웃음) SF 작가들은 실제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야기에 맞추는 작업을 하잖아요. 정말 존경하게 됐어요. 그런데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은 기존의 상식을 다 깨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쓴 게 맞을지도 모르죠. 실제 요리에서 그런 작용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작가님의 소설관을 엿보게 하는 말씀인데요. 좀 더 자유롭게 소설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처럼도 들리거든요.
맞아요, 제 소설은 그냥 자유롭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제멋대로인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그런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계속 ‘이러면 왜 안 돼?’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더 나아가봐요. 어떨 때는 ‘이거 너무 평이한데? 어떻게 꼬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작가마다 세계가 다 다른 것 같아요. 제 소설의 재미라면 전형성을 깨는 걸 거예요. 파격, 낯섦인데요. 이것이 전에 없이 새로운 것은 아니겠지만요. 현실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는 데서 오는 신선함이 제게는 중요한 것 같아요. 반드시 웃기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낯선 환기를 소설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특히 작가님이 재미있게 쓴 장면을 꼽아주시면 어떨까요?
거의 대부분 쓰면서 재미있었어요. 워낙 편집을 많이 했어요. 대략 17교까지 받은 것 같아요. 고쳐야 할 게 너무 많았던 거죠. 그렇게 많이 봤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웃겨요.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인물의 이름도 웃기더라고요. 가령 ‘셰르비엥 삼시용사시옹’이나 ‘로라 앙노라’라는 이름은 편집을 볼 때마다 웃었어요. 저는 그런 말장난에 재미를 많이 느껴요.
소설의 한 축이 시라면 다른 한 축은 요리잖아요. 흥미롭게도 이 둘이 아주 긴밀하게 움직여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요리와 시의 공통적인 가치는 무엇인가요?
우선 재료들이 있죠. 그걸 지지고 볶아요. 그래도 맛이 안 나는 경우가 많아요. 정확한 타이밍, 불 조절, 식재료의 성질, 조리하는 순서 등을 모두 맞춰야 요리가 되는 거잖아요. 시도 마찬가지 같아요. 우리가 단어들을 다 갖고 있어도 그걸 써서는 시가 되지 않아요. 그런 묘한 데가 닮았어요. 전문적인, 반짝이는, 노력에 의해 얻어진 뭔가 하나가 들어가야 시가 되고, 요리가 된다는 것. 결국 예술성이고요. 그것이 가미되어야 완성이 된다는 점이 비슷한 것 같아요.
“인간의 짧은 생은 지나가지만 그 무언가는 꾸준히 남는 것이었다”(256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주제가 되는 문장이죠. 이 소설의 제목이 ‘삼탈리아 빈티지’일 때부터 그 주제를 정해두고 썼어요. 인간이야 길면 백 년 살지만 빈티지는 몇 백 년도 가잖아요. 그것만이 가지는 아름다움, 오래 남는 것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려고 했어요. 이제 막 나온 것보다 오래된 것이 더 괜찮아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무게, 그것이 보아온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탐미주의적으로 너무나 끌리는 소재였어요.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 묘비 앞에서 이원식이 그간의 역사를 목격하는 장면도 처음부터 정해두고 쓰신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쓰면서 어떻게 이 주제를 보여줄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죠. 여러 개의 안이 있었는데요. 가장 나은 장면인 것 같아요. 더 황당한 것도 많았어요.(웃음)
소설은 한편으로 사랑 이야기로도 읽히거든요. 어느 평행 우주에서 다른 사람과 연인이 되는데 어쩌면 이곳의 연인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말이에요. 아주 로맨틱했어요.
이 세계의 연인과 저 세계의 연인. 되게 비슷한 캐릭터인데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고민이 됐어요. 그러다가 이름으로 연결을 했죠. 독자는 ‘이 사람이 이 사람인가?’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사랑의 순정은 잘 그려보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원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어요. 남자인 주인공이 다른 연인들을 만나는 게 바람둥이처럼 보일 것도 같고, 싫은 거죠.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순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한 사람을 계속 만나는 것으로 바꾸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요. 자다가 벌떡 일어났어요.(웃음) 이 관계 역시 시간이 쌓여가는, 빈티지의 아름다운 점들이 담기는 느낌을 줄 수 있겠더라고요. 정말 딱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빈티지라는 말은 순정이라는 말과 많이 닮아 있네요.
의외로 그랬어요. 순정만 남아 있는 게 빈티지죠. 순정이 아니었던 것은 빛이 바래고 순정만 쌓이는 거예요.
‘작가의 말’에서 왜 자꾸 웃기려고 하느냐는 동료들의 물음에 “그동안 웃기게 대답한 게 부끄러워 요즘 소화가 잘 안 된다”(368쪽)고 쓰셨잖아요. 요즘의 답은 많이 달라졌나요?
우주에 태어난 인간은 우주 안에서 웃길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의 답이에요. 왜냐하면 우주 자체가 유머에서 탄생했으니까요.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 아직은 모르잖아요. 만약 ‘웃기려고’가 답이라면 어떨까요. 우주 자체가 정말 웃기잖아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사정없이 흩어져 있고, 우리는 또 왜 이 조그만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인지. 결국 이 모든 게 거대한 유머가 아닐까 생각하면 이 우주 안의 인간은 웃긴 게 당연한 거예요. 이렇게 거창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웃기게 답변했구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죠.(웃음) 최근 쓴 단편이 있는데요. 주인공이 비운에 시달리다가 결국 우주 안에 지구, 그 안에 생명체로 살고 있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그 행운의 생명체가 잠깐 일이 안 풀린다고 비운이라고 여기는 건 맞지 않는 얘기다, 라는 내용이에요. 곧 공개할 예정이에요.
꼭 쓰고 넘어가야 했던 이야기라고도 하셨잖아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웃긴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었어요. 웃긴 소설은 저의 1기 소설로 정리해두고 싶었거든요. 이제 정통 소설도 쓰고 싶어요. 이 정도 웃겼으면 됐으니까요.(웃음) 이번 소설에서 웃길 수 있는 건 마음껏 하고 다음부터는 하지 말자, 생각했죠.
팬 분들이 아쉬워할 이야기 같네요.
아쉬워하시면 또 쓰고요.(웃음) 그런데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꼈어요. 점점 유머감각이 떨어지잖아요. 이제는 아재개그를 쓰게 되고 말이에요. 20-30대를 웃길 방법은 못 찾겠더라고요. 그렇다고 계속 몸개그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웃기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요. 유머의 세계가 만만치 않아서 사실 그것만 파고 들어도 부족할 거예요. 거기에 문학도 하려면 에너지가 너무 분산이 되어서 ‘여기까지만 할까?’ 생각했어요. 물론 웃기려고 하는 말일 수도 있어요.(웃음)
*박상 나이 같은 건 모르겠고, 기분엔 이천년 대에 태어난 것 같음. 태어난 곳 부산, 다시 태어난 곳 서울, 런던, 전주. 기분엔 안드로메다에서 태어난 것 같음.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가서 아주 간신히 졸업했음. 음식배달, 트럭운전, 택시운전을 하다가 면허정지 취미에 빠져 그만둠. 정신 차리고 삼겹살집 차렸다가 냅다 말아먹었음. 절망으로 찌그러져 있었지만 2006년 신춘문예에서 운이 좋았음. 인생 모르겠음.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문학 동지들과 아직도 소설을 읽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애정이 있음. 쉽게 부끄러워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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