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해도 괜찮아
비 오는 날에 대해서
‘비 오는 것을 좋아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많은 경우 조건부 긍정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이 집에 있을 때 좋다는 건데, 비 오는 풍경은 좋으나 신체는 뽀송뽀송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1.06.11)
비 오는 걸 좋아한다. 단, 집에 있을 때만.
‘비 오는 것을 좋아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많은 경우 조건부 긍정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이 집에 있을 때 좋다는 건데, 비 오는 풍경은 좋으나 신체는 뽀송뽀송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인을 비롯해 많은 시간을 외부활동으로 연명해야 하는 상당수 어른은 비를 좋아하기 힘들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사실, 나는 신체의 뽀송뽀송함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라도 비 오는 것을 좋아했다. 우산 끝에서 팔목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느낌이 좋았다. 운동장 한편에 앉아 빗물이 만든 작은 강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요즘 유행하는 캠핑의 '불멍' 같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뭇잎을 띄워 나이아가라 폭포 역할을 한 하수구까지 보내는 놀이도 빠질 수 없었다. 강 한편에서 빗속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개미들을 구경하며, 그땐 그것이 내 미래의 모습이 될 줄은 몰랐으나, 베짱이와 달리 이런 날씨에도 열심히 일하는 개미의 성실성에 감탄하기도 했다. 운동화 구멍 사이로 푸슉 푸슉 빗물을 펌프질 하며 돌아와, 따뜻하게 샤워하고 마시던 건 코코아였다. 나중에는 막걸리.
'비 오는 날은 분위기 있어서 좋다'라고 쓴 초등학교 3학년 당시의 일기를 근거로, 최소한 나는 11살부터 비 오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 시절까지 비 오는 것을 별다른 조건 없이 좋아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비 오는 날이 주는 비 일상성이 그 이유였다. 요즘 유행어로 치면 '킬링 포인트' 정도 되려나.
나는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면 창으로 들어오는 쨍쨍한 아침햇살은 좋아하지 않았던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것 역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비 오는 날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내가 반기지 않는 일상과는 다른 색감의 날이었다. 학교 가는 일상을 싫어했으나 땡땡이를 칠 용기까지는 없던 나에게 위안이 되었던 날이기도 했다. 비 오는 어두컴컴한 창밖을 보며,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교실에서 친구들과 있는 것이 좋았다.
비 오는 운동장에서 봤던 그날의 개미들처럼, 눈비 맞아가며 꾸준히 교통카드를 찍다 보니 어느새 10년 차 직장인. 비 오는 밤이면 '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죽겠네'라고 비 오는 미래를 걱정하는 존재가 되었다. 비 오는 미래를 걱정하는 나로 변모하기까지의 명확한 경계선은 떠오르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먹고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고양이 낚싯대를 초당 500회의 속도로 흔들어 대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우리 집 고양이 역시 10년 차 묘생을 살고 있다. 코 앞에서 흔들리는 낚싯대에 심드렁한 모습이, 비 오는 날을 투덜거리는 지금의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뿐일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살다 보니' 좋아했던 삶의 다채로움을 잊거나 성가셔한다.
물론, 영화 기생충의 가족처럼 비는 누군가에게 미세먼지를 없애주고 캠핑을 만끽하게 해주는 존재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끔찍한 재난의 기억일 수 있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일상을 섬세하게 느끼게 해 준 어린 시절의 즐거운 기억이다. 하루를 섬세하게 대하며 살아갔던 시절에, 비 말고도 좋아했던 것들이 우리에게는 몇 개쯤 있었을 것이다. 그건 한잔의 차일 수도 있고, 모니터 옆에 둔 선인장 또는 가족과 함께 먹는 저녁밥일지도 모른다. 먹고살다 보니 좋아했던 사실을 잊게 된 것들.
그리고 아마 이런 글을 읽고 다시 그때의 정취를 떠올려보겠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을 삶 속에서 우리는 금세 잊고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나는 출근할 때 오는 비를 성가시게 느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은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나를 그리고 그때의 내가 맡았던 냄새와 촉감을 기억해 본다. 지금보다 순수했던 시절에 좋아했던 것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많은 응원이 된다고 믿는다. 장마의 초입. 비 오는 날 재택근무를 하며 뽀송뽀송한 몸으로 창밖의 비를 보니 풍경이 예쁘다. 저녁에는 우산을 쓰고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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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게 인생이라던데 슬픔도 유쾌하게 쓰고 싶습니다. kysan@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