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화가 김두엽 “여든 셋에 시작한 그림, 인생에 봄이 왔다”
에세이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
나는 뭘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림도 재미있으니 그렸지 다른 건 하나도 몰라요. 화가가 되겠다거나 그림으로 뭘 해보겠다는 마음은 가져본 적도 없지요. 그냥 하다 보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네요(웃음). (2021.05.14)
도화지와 물감을 벗삼아 매일 그림을 그리는 노모와 택배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화가 아들이 있다. 2019년 KBS <인간극장>에 방영된 두 사람의 애틋한 일상은 수많은 시청자를 감동케 했다. 홀로 우두커니 앉아 아들을 기다리던 김두엽 할머니 삶에 생기를 더해준 건, 여든이 넘어 시작한 그림이었다. 재미삼아 달력 뒷장에 그린 사과 한 알을 보고 “잘 그렸다”고 칭찬한 아들의 한 마디에 그는 꽃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살아온 인생을 그리다 어느덧 십여 차례의 전시회를 연 화가가 되었다.
올해 나이 아흔 넷, 늦깎이 화가의 삶이 책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로 출간됐다. 지금까지 그린 작품만 300여 점. 그중에서 작가에게 의미가 있는 110여 점의 작품을 책에 함께 담았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며느리가 그 말을 받아 적어 완성한 책이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일우스페이스’에서 <우리 생애의 첫 봄> 모자전(母子展)을 개최하고 있는 김두엽 작가를 만났다. 인터뷰 자리에는 김두엽 작가의 막내 아들이자 그의 타고난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화가 선배, 이현영 작가도 함께했다.
83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어느덧 화가이자 작가가 되셨어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김두엽: 좋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요.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서울에서 전시회를 한다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안 오려고 하다가 그래도 한번 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올라왔어요. 서울 도착한 첫 날은 힘들었는데 하루 쉬고 나니까 이제 좀 괜찮네요. 가족들이 전시회에 다 찾아와서 축하해주고 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이현영: 예전에는 저 혼자 전시를 하러 다녔는데, 지금은 어머니의 작품을 함께 걸 수 있어서 좋아요. 아들로서 뿌듯하죠. 많은 분이 전시를 보러 와 주셔서 그 관심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가요?
김두엽: 그림 그릴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거든요. 물감 칠하면서 스케치북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름이 다 없어져요. 그림 그릴 때가 제일 행복해요. 시간도 아주 잘 가고요.
그림은 주로 언제 그리세요?
김두엽: 아침 먹고 앉아있다가 한 10시쯤부터 그려요. 그쯤 되면 ‘그림이나 한번 그려볼까’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한번 앉아서 그리기 시작하면 5~6시간은 꼬박 앉아서 그릴 때가 많죠.
여든이 넘어 그림을 시작하셨어요. 첫 작품은 달력 뒷장에 그린 사과 그림이었다고요.
김두엽: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어요. 낮에 매일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주워 가지고 달력 뒷장에 사과 하나를 그렸는데 아들이 집에 와서 “엄마 이거 누가 그렸어?”하고 물었어요. “내가 그렸지, 누가 또 그릴 사람이 있느냐” 하니까 “우리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하더라고요.
이현영: 어머니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과의 근육이나 꼭지 같은 걸 섬세하게 잘 표현하셨거든요. 계속 그림을 그리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색연필을 가져다 드렸는데, 색채 감각이 정말 좋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물감을 드렸어요. 물감을 사용하니 색채가 더욱 밝아지면서 어머니 그림만의 독특한 느낌이 나왔죠. 저는 어머니께 그림을 가르쳐드린 적이 없어요. 물감을 혼합해서 새로운 색상을 만드는 방법 같은 것도 일러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시거든요. 그래서 물감 튜브에서 나온 색상을 그대로 사용할 때가 많은데요. 원색을 마구 칠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림 속 색채가 조화로워요. 다양한 색이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지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계속 잘한다고 말씀을 드리니 꼭 춤을 추듯이 기뻐하면서 새로운 그림들을 매일 그리셨어요.
아들의 칭찬을 받고 어떠셨어요?
김두엽: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그런가? 내가 잘 그리나?’ 싶었지요(웃음). 칭찬을 받으니까 신이 나서 그 뒤로 달력 뒷장에 매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읍내에 나가서 스케치북을 두 개 사가지고 왔어요. 읍내 초등학교 앞에 문구점이 하나 있거든요. 그때부터 종일 앉아서 한복 입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그리고, 짧은 양장 치마 입고 춤추는 모습도 그리고 그랬죠. 다 그린 그림은 벽에 붙여놨는데 교회 목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보시고는 잘 그렸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들 잘한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또 그리고, 또 그리고 했지요(웃음).
타고난 손재주가 있으신 것 같아요.
이현영: 맞아요.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짜깁기도 아주 잘하셨어요.
김두엽: 10년 여간 세탁소를 운영했거든요. 쉰 살까지는 계속 농사를 짓다가, 그 후에 세탁 기술을 배워서 여수로 갔어요. 거기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나 얻어 세탁소를 했는데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손님이 많았어요. 그때 짜깁기를 많이 했지요.
일상에서 보는 사물부터 기억 속 한 장면까지, 다양한 풍경이 작품에 등장하는데요. 소재는 어떻게 정하세요?
김두엽: 그냥 주변에 있는 것을 그리기도 하고요. 가만히 앉아서 ‘뭘 그릴까?’ 고민해도 아무 생각이 안 나면 TV를 봐요. TV에 재미있고 예쁜 게 많이 나오니까 ‘아 저걸 그릴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얼마 전에는 TV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축구선수 박주호네 삼남매를 그렸어요. 어떤 날에는 책을 보기도 해요.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면 또 그리고 싶은 게 생각나거든요.
이현영: 동화책이나 곤충과 식물 사진이 많은 자연 백과 같은 것들을 어머니가 주로 계시는 테이블 옆에 가져다 놨거든요. 심심하면 한 번씩 책을 펼쳐보다가 아이디어를 얻으시는 것 같아요.
작가님 작품에는 꽃 그림이 정말 많더라고요.
김두엽: 꽃은 보면 예쁘니까 그려요. 알록달록하니까 그림을 그려도 예쁘더라고요. 우리집 마당에 아들이 꽃을 많이 심어줘서 보고 그릴 꽃이 많아요. 수선화도 그리고, 개나리도 그리고, 코스모스도 그리죠.
책 표지의 제목을 직접 손 글씨로 쓰셨죠. 70살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들었어요.
김두엽: 사느라 바빠서 한글을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60살쯤 되었을 무렵에 막내아들이 “어머니 한글 배우세요”라고 권했지만 이 나이에 해봤자 뭐하나 싶어서 거절을 했어요. 배운다고 잘 할 자신도 없었고, 이제 와서 배워봤자 얼마나 더 사나 생각했지요.
그러다 72살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글을 모르니까 답답한 거예요. 목사님이 성경책과 찬송가 책을 선물로 주셨는데, 예배 때 “마태복음 1장을 펴세요”라고 해도 어디를 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옆 사람 보고 따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한글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은 찬송가도 정확한 가사를 몰라서 얼버무리며 불렀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성경책을 찾아보셔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기도를 했어요. “제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하고요. 그날 이후로 복잡한 글자들은 막내 아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해서 천천히 배웠고, 단순한 글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송가를 부르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어요. 이제는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어요. 한글을 배우고 난 뒤에는 은행에서 통장도 만들고 돈도 찾을 수 있어서 좋아요.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내 그림에 사인할 수 있다는 거죠. 뭘 배우는 데 나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요?
김두엽: 저는 1928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어요. 너무 가난한 시절을 살았죠.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에요. 더군다나 나는 여자였잖아요. 지금은 여자들이 공부도 하고 돈도 벌지만 그때는 그런 걸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때 내 꿈이 무엇이었을까…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 아이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것, 남편과 다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가 나의 꿈이라면 꿈이었지요.
지금은 꿈이 생기셨을까요?
김두엽: 언제까지 시간이 허락될 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면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은 게 꿈이에요. 여든 살 넘어서 우연히 그린 그림이 나에게 가져다 준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이 시간이 너무 감사해요.
아들 이현영 작가님의 꿈은 “예술의 전당 같은 큰 장소에서 어머니 전시회를 열어드리는 것(112쪽)”이라고요.
이현영: 처음 어머님 그림을 봤을 때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이 그림을 나만 보기가 아까워서 첫 전시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후로 어머니의 그림을 보신 분들이 하나같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려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기쁨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셔서 쭉 그림을 그리신다면 언젠가는 예술의 전당처럼 큰 장소에서도 전시를 했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김두엽: 나는 뭘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림도 재미있으니 그렸지 다른 건 하나도 몰라요. 화가가 되겠다거나 그림으로 뭘 해보겠다는 마음은 가져본 적도 없지요. 그냥 하다 보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네요(웃음).
이번 전시 제목이 ‘우리 생애의 첫 봄’이에요. 어떤 의미인가요?
이현영: 올해는 어머니와 제 인생의 첫 번째 봄이 온 것 같아요. 그동안 어머니가 제 결혼을 무척 바라셨는데, 작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거든요. 어머니와 아내, 저 세 사람이 함께 사는 첫 봄을 맞이했다는 의미로 전시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책 작업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것 같아요.
이현영: 맞아요. 대부분의 이야기는 함께 살면서 자주 들려주셨던 옛날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그 외에도 제가 몰랐던 어머니의 모습을 알게 됐죠. 처음 시집 가서 고생했던 내용이나, 어머니 작품 ‘꽃밤 데이트’에 등장하는 첫 사랑에 관한 애틋한 사연 등은 책을 쓰면서 자세히 알게 됐어요.
김두엽: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 18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왔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다 고생하고 살았어요. 지금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생은 고생도 아니에요(웃음). 가난해서 밥 굶는 날이 허다했고, 시집 가는 날짜도 모르는 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요. 젊어서 아이들 키울 때에는 먹을 게 없어서 메뚜기도 많이 잡아먹었어요. 그래도 자식들은 고생 안 시키려고 애를 쓰며 살았어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김두엽: 아무 것도 아닌 저의 이야기를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하늘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그림을 그릴 거예요.
이현영: <인간극장>에 저희 모자의 이야기가 방영된 이후로 어머니 작품을 보고싶어 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이 책에는 어머니의 그림이 110점 정도 담겼습니다. 책으로나마 그림을 감상하시면서 독자분들이 잔잔한 행복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두엽 94세 할머니. 그리고 12년 차 화가. 83세의 어느 날, 빈 종이에 사과 하나를 그려놓은 것이 계기가 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인 막내아들이 건넨 칭찬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예쁜 말이 계속 듣고 싶어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덧 화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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