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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웅배 칼럼] 내가 명왕성을 죽였습니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5월호
만약 명왕성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태양계 끝자락에서 2006년의 판결을 보고 우울해하고 있을 명왕성에게 이 책을 읽어주며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명왕성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변명해주고 싶다. (2021.05.10)
“새로운 별 같은 걸 찾으시나요?” 내가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때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그리곤 속으로 혼자 생각한다. 새로운 별을 찾냐고? 세상에 요즘 시대에 대체 어떤 천문학자가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을까?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천문학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밤하늘에서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새로운 소행성과 혜성을 발견하고 태양계 구성원의 수를 늘리는 것 자체만으로 위대한 과학적 업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다 지나갔다. 이미 최첨단 자동화 망원경과 프로그램들이 하늘 전역을 훑어보며 거의 모든 별과 은하, 천체들의 지도를 그려놓았다. 오늘날 현대 천문학자 대부분은 “새로운 별”을 찾는 그런 사소한 일에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오늘날 직업 천문학자 대부분은 “새로운 별” 같은 걸 찾는 사소한 일은 이제 취미 삼아 매일 밤하늘 사진을 촬영하는 동호인들,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에게 맡겨놓고 천문학적으로 보다 더 의미 있는 연구에 몰두한다.
하지만 마이크 브라운은 다르다. 그는 아직까지도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숨어있는 행성”이 태양계 끝자락 어둠 속에 숨은 채 인류가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아직 명왕성이 태양계 가장 마지막 아홉 번째 행성으로 불리던 그 시절, 브라운은 태양계 행성이 명왕성에서 끝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을 품었다. 정말로 오늘날의 인류가 태양계를 이루는 덩치 큰 주요 천체들을 전부 다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심 속에서 브라운은 매일 밤 망원경이 촬영한 까만 밤하늘 사진 속에서 수없이 찍힌 별들 사이로 느리게 움직이는 작은 점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하늘을 관측하는 망원경의 성능만 좋아졌을 뿐, 앞선 중세 시대 선배 천문학자들이 하던 일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세 시대 “별 사냥꾼”의 유훈을 이어오고 있는 21세기의 유일한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주변의 동료 천문학자들은 더 의미 있는 연구 주제로 갈아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새로운 행성 같은 걸 찾는 의미 없는 일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칼텍 조교수에서 잘리면 어떡하냐고 걱정했지만 브라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명왕성보다 더 먼 태양계 끝자락 어둠 속에서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모두 명왕성과 거의 비슷한, 심지어 명왕성보다 살짝 더 큰 크기의 천체도 있었다! 그렇게 브라운은 드디어 자신이 (아홉 번째 행성으로 불렸던) 명왕성의 뒤를 이어 태양계 열 번째, 열 한 번째 행성의 발견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명왕성과 엇비슷한 크기의 작은 천체들이 너무나 많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명왕성도, 그리고 자신이 새로 발견한 다른 소천체들도 다 행성으로 부를 수 있다면, 뒤이어 발견된 수백 개의 다른 소천체들 역시 행성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태양계 행성이 꼭 9개, 10개 정도만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기준에만 부합한다면 태양계 행성은 200개도, 천 개도 될 수 있다. (물론 태양계 행성을 외우는 학생들은 피곤하겠지만)
사실 명왕성을 비롯한 태양계 외곽 소천체들을 행성으로 인정해주어야 할지 말지 천문학자들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던 데에는 재밌는 사실이 하나 숨어있다. 애초에 인류는 “행성”이란 단어를 과학적으로 정의한 적이 없었다. 수천 년 간 아무런 의문 없이 사용해온 그저 관습적인 단어였을 뿐, 행성은 과학적인 정의가 없는 단어였던 것이다! 사실 명왕성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만 해도 정확한 과학적 정의가 없어도 무엇이 행성이고 무엇이 행성이 아닌지 쉽게 분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굳이 무엇이 바다이고 무엇이 호수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해양학자들이 정한 장황한 정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기존에 알고 있던 소행성과 행성은 너무나 명확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왕성과 그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형태만 보면 행성치곤 크기도 작은 것 같고, 궤도 역시 여타 다른 행성들과 달리 오히려 혜성에 더 가까운 크게 찌그러지고 기울어진 타원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명왕성과 그 친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천문학자들은 2006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 천문 연맹 회의에서 명왕성의 운명을 가르는 투표를 진행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날 투표의 안건이 “명왕성의 운명”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더 정확하게 당시 투표의 안건은 “이제라도 행성이라는 단어의 과학적인 정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한쪽의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행성으로 불러왔던 명왕성을 선뜻 쫓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명왕성을 살려주기 위해 뒤이어 브라운이 발견했던 새로운 소천체들을 추가로 행성으로 편입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기존에는 단순히 소행성이라고 부르던 다른 천체들도 행성으로 포함할 수 있는 새로운 정의를 제안했다. 그 방식이라면 2006년 당시 기준으로 태양계 행성은 아홉 개에서 열두 개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반면 반대쪽의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골치 아프게 했던 명왕성을 이참에 행성 명단에서 퇴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왕성을 비롯한 태양계 외곽의 소천체들을 모두 왜소행성이라는 새로운 등급으로 강등시키고, 태양계 행성을 깔끔하게 수금지화목토천해까지 여덟 개로 줄이자는 안을 제안했다.
이 치열한 공방 속에서 브라운은 어느 편에 섰을까? 아마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소천체들이 추가로 열번 째, 열한번 째 행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제안을 지지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브라운은 그렇지 않았다. 개인의 욕심보다 과학의 합리성을 택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이 발견한 천체는 새로운 행성으로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소천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똑같이 볼품없는 명왕성도 함께 행성 목록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명왕성에게 새로운 태양계 행성 동생들을 찾아주고자 시작했던 브라운의 연구는, 오히려 명왕성마저 태양계 호적에서 같이 쫓아내 버리는 전혀 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현대 천문학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 혼란이 지나고 나서, 브라운은 미국 시민들에게 역적이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미국의 천문학자가 발견한 태양계 가장 끝의 행성으로 사랑받았던 명왕성을 더 이상 행성이라 불릴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브라운은 명왕성을 죽인 “플루토 킬러(Pluto killer)”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브라운의 트위터 계정 아이디가 @plutokiller다!)
마이크 브라운은 자신이 어떻게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끝내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행성 후보 천체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왜 명왕성을 쫓아내야 한다는 편에 서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를 통해 재치있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책 중간중간 명왕성을 계속 행성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에게 날리는 재치 있고 날카로운 문장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과학적 합리성과 학자적 양심을 중요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브라운은 딸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행성 후보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딸이 태어나면 새로운 행성에 딸의 이름을 지어주고 선물을 해줄 것이라 다짐했지만 그는 결국 그러지 않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갓 태어난 딸과의 약속조차 포기할 만큼 브라운에게 과학의 합리성은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명왕성이 새로운 행성으로서 처음 발견되고 한동안 아홉번 째 행성으로 불리다 다시 퇴출되기 까지 명왕성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명왕성은 수억 km 떨어진 지구란 행성에 사는 인간 천문학자들이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신경도 쓰지 않고 천천히 그저 자신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명왕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이래의 혼란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인류는 과학을 통해 자연과 우주 그 자체에 녹아있는 우주의 정의와 법칙을 발굴해내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은 사실 시대에 따라, 우리의 취향과 편의에 맞춰서, 우리가 보기 편한대로 설정한 작위적인 체계에 우주를 정의하고 우겨넣는 것일까? 과연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애초에 “행성”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명왕성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태양계 끝자락에서 2006년의 판결을 보고 우울해하고 있을 명왕성에게 이 책을 읽어주며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명왕성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변명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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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알리는 천문학자. 『썸 타는 천문대』, 『하루종일 우주생각』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