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의 Designers’ Desk] 전천후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단단한 활력 - 유진아 디자이너
<월간 채널예스> 2021년 5월호
유진아가 디자인한 책을 보면 행복한 기분이든다. 타고나서 다듬어온 성격, 쌓아 올린 가치관, 일과 여가 사이에서 맞추어내는 균형,직장 바깥의 이런 요인들이 디자인에 드러나는 것이라 짐작하며, 무엇이 이런 낙천적인 활기를 만드는 걸까 확인하고 싶었다. (2021.05.07)
한 주 동안에도 수많은 책이 발간되는 대형 출판사 민음사의 디자인팀. ‘미술부’라는 이름을 쓰는 이곳에 고유한 활력으로 책에 생기를 불어넣는 유진아 디자이너가 있다.
유진아는 민음사 미술부를 배경으로 일한다. 출판사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회사 성향과 개인 성향의 균형을 맞춰나간다. 민음사에는 여러 계열사가 있다. 어린이 책을 내는 비룡소 미술부는 공간을 따로 쓰고, 민음사를 비롯한 성인 단행본 계열사 미술부는 한 공간에 세 팀이 모두 모여 있다. 유진아는 이 중 5인의 디자이너로 구성된 민음사팀에서 근무한다.
그는 단권으로는 문학과 비문학을 망라하면서, 시리즈물로는 철학 에세이와 연속 간행물 『한편』을 담당하고 있다. 민음사처럼 다루는 분야가 넓고 권수가 많으면 디자이너는 전천후여야 한다. 또 수만 부를 넘어 많게는 수십만 부에 이르며 재쇄를 거듭하는 책들은 독립출판이나 1000부 이내에서 그치는 도서와 달리 실험성보다는 안전과 효율이 중요하다. 그래서 종이나 몇몇 요인들은 상수처럼 정해져있다시피 하다. 본문 타이포그래피는 픽서티브를 뿌린 듯 종이에 착 붙어서 긴긴 독서를 노련하게 지원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많은 책과 넓은 분야를 정해진 시간 동안 모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처리하는 와중에도, 디자이너 개인의 꿈틀대는 유머와 재치는 나직한 웃음처럼 비어져 나온다. 민음사 철학 에세이인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 장 폴 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은 회사 및 독자의 요구와 디자이너의 운신 사이에서 그가 어떤 균형을 잡으며 고유한 톤을 얹는지 잘 보여준다.
딱딱해지기 쉬운 철학 에세이에 부드러운 색감을 입혔고, 과하지 않은 선에서 타이포그래피적인 위트를 주었다. 『행복의 형이상학』에서는 저자 이름이 거꾸로 서 있고, 『자아의 초월성』은 제목이 흐린 거울에 반사되듯 처리했다. 차분한 접근이지만 글자들이 마치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듯 느껴진다.
『전국축제자랑』은 2020년대 초반을 지나가는 한 경향을 드러낸다. 폰트 디자인과 북 디자인이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며 공진화해가는 경향이다. 함민주가 디자인한 폰트 블레이즈페이스는 저자 김혼비, 박태하의 문체 및 책의 주제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공명한다. 이들의 유쾌한 목소리를 유진아가 표지 디자인으로 잇는다. 단단한 기량 위에 기지와 활력이넘치는 저자·폰트 디자이너·북 디자이너, 이 세 분야 창작자들이 책의 제목 위에서 흐뭇하게 만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보이는 디자인 가운데 대표작을 고르기 어렵고 전체 작업을 모두 보여주기도 불가능해 마침 유진아의 작업 책상 주위에 있는 디자인만 모아 보았다. 대형 출판사 특성상 표지는 마케팅을, 본문은 익숙하고도 높은 가독성을 보장하며 독자편의와 유관 부서들의 의견에 부응해야 하지만, 그래도 기본만 충실하게 제공하면 디자이너만의 자유가 허용되는 공간이 있다. 면지 색상, 속표지, 바코드, 차례 디자인, 페이지 번호 폰트. 여기서 허용되는 자유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며 유진아는 환호한다. 과감한 색 배합의 면지 선택, 생명처럼 꿈틀대는 폰트, 낯섦을 끌어들인 활력이 책을 완성시킨다.
유진아가 디자인한 책을 보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 타고나서 다듬어온 성격, 쌓아 올린 가치관, 일과 여가 사이에서 맞추어내는 균형, 직장 바깥의 이런 요인들이 디자인에 드러나는 것이라 짐작하며, 무엇이 이런 낙천적인 활기를 만드는 걸까 확인하고 싶었다. “익숙한 폭력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동물권 운동을 꾸준하고 건강하게 지속하고 싶다. 신을 믿으며, 비건의 삶을 지향한다.” 과연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책상 위에는 동물 사진들, 일본 디자이너 후쿠사와 나오토가 만든 브랜드로 가죽보다는 가급적 종이를 제안하는 ‘시와(紙和)’의 소품들, 성모상이 생명의 평화를 웅변하며 조용히 놓여 있었다. 유진아의 여가를 채우는 것은 친구, 모태 신앙인 가톨릭, 일본의 밴드 음악,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 동물권 단체의 운동을 후원하는 활동이다. 관계, 초월, 취향, 세상을 향하는 태도.
이 모두를 지향하는 여가가 회사 생활과 조화를 이룬다. 동물에 관해서는 10대일 때부터 함께 자란 반려견 초롱이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해 17년의 생을 마친 반려견을 회상하는 유진아의 목소리가 촉촉해졌다. 치매라고 했다. 16년을 건강하게 살던 개가 생의 마지막에 몹시 아팠다. 어머니는 개를 돌보느라 건강이 악화 되었다. 동물의 아픔에 더 잘 대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늘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2013년부터 자신의 지향에 맞는 동물권 단체들을 후원하며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그의 디자인에는 동물이 많다. 고래가 하느작 유영하고, 동물 발자국이 찍혀 있으며, 사육곰이 바코드의 세로줄 사이를 지나간다. 글자라고 다르지 않다. 움찔대는 생명력을 기뻐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문잡지 『한편』 4호 ‘동물’의 제목으로는, 기존의 엄숙한 단행본에서는 잘 쓰지 않던 태-물감체를 골라 손질했다. 이렇게 별난 폰트를 이해하며 헤아리려는 마음을 우리는 읽게 된다. 일본 소설 『카페 고양이 나무』의 원제에는 ‘킷사(喫茶)’라는 단어가 있다. 로마자 폰트인 블레니 블랙(Blenny Black)을 한글화함으로써, 양식과 일식이 결합된 킷사텐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드러냈다. 블레니 블랙은 능청스럽고도 살찐 고양이를 닮았다. 일상과 소신에서 우러나는 애정과 기쁨이 책에 은근하게 스며들며,이런 신호를 수신하는 독자들은 행복해지고 안도한다.
이 글을 마감하기 직전, 그가 부탁을 하나 했다. 지난해 작업 중 동물 캐릭터 디자인은 빼달라고 했다. 돼지해의 돼지 캐릭터가 결국은 인간 편의대로 돼지를 소비하고 죽이는 실상을 오히려 드러내지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부탁을 듣고서, 나는 그가 자신이 한 말을 매일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는 한 수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 삶에서 덜 틀린 것과 더 나은 것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디자인을 철수하는 일은 반성적인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현장을 지탱하는 이런 마음들로부터, 우리는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 조금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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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