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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의 꽤 괜찮은 책]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우리 -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5월호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다름아닌 제목에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고 명시한 부분이다. 별 연구자의 이야기인 만큼 책 속에는 당연히 우주와 별이 많이 등장한다. (2021.05.04)
며칠 전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다 우연히 10년 전 일기를 읽게 되었다.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출렁거리는 배에 올라타 바다를 바라보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문득 내년 휴가에는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창해서 깜깜하기까지 한 숲을 지나쳐 오로라를 바라보는 그 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때쯤 되면 마음도 제자리를 찾겠지.” 읽는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장소, 더불어 그날의 기분까지도. 아마도 그날, 나는 마음이 무척이나 어지러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토록 마음이 어지러웠던 날, 왜 하필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물론 당시 나의 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내가 쓴 글이라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 했는지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짐작컨대, 아마도 오로라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 현상을 보고 나면 세상사로 인한 자잘한 번뇌 따위는 금세 잊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러니까 번민과 고뇌에 부딪힌 어떤 순간에 본능적으로 ‘우주적인’ 어떤 것을 떠올린 것이다. 비록 다짐과는 다르게 이듬해 오로라를 보러 가지는 못했지만.
그러고보니 물리학과 출신의 남편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같은 이공계라도 전공별로 연구자들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주제였는데, 남편은 공학보다는 자연과학 쪽이, 자연과학 안에서는 천문학 전공자들이 유난히 성품이 너그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별과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라는 거대한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것 같다나 뭐라나. 물론 객관적 근거 따윈 없는, 어디까지나 남편의 ‘느낌적 느낌’에 근거한 발언이었을 뿐이다. 나 역시 당시에는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는 동안 문득 오래전 남편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고, 어쩌면 그러한 ‘느낌적 느낌’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천문학자 심채경의 에세이집이다. 한 고등학생이 우연한 계기, 그러니까 지구과학 시간에 ‘연주시차’에 대해 설명하며 눈을 반짝이는 선생님을 보고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부터 천문학과에 진학하여 천문학자가 되기까지의 사연, 타이탄이라는 생소한 행성을 연구주제로 삼게된 일화, 이후 박사를 마치고 달로 주제를 바꾸게 된 까닭, 이후 네이쳐에 차세대 달 연구자로 소개되기까지의 과정 등, 연구자가 특정한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전공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서 겪었을 법한 생생한 에피소드가 가득 담겨 있고, 분야가 평소 쉽게 접하기 힘든 천문학인 만큼 일단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다.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다름아닌 제목에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고 명시한 부분이다. 별 연구자의 이야기인 만큼 책 속에는 당연히 우주와 별이 많이 등장한다. 별을 연구하고 별에 대해 이야기하며 별에 관한 글이 가득 실린 책을 낸 사람이 별을 보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읽다보면 자연스레 납득하게 된다. 비록 ‘천문학자’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긴 했지만 책은 천문학자가 바라보는 세상만을 다루지 않는다. 저자는 천문학자이며 행성과학자이지만, 비정규직 연구원이자, 여성이고, 아내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동시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이자 작가일 때도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책 제목인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진짜로 천문학자로서 별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문학자라고 하여 별’만‘ 바라보지 않는다’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에는 여러 겹의 렌즈를 통하여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입체적인 시선과, 그렇게 마주한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학점이 잘못된 것 같다고 문의해온 학생에게 문제가 없음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연구자로서의 엄격하고 꼼꼼한 자질이 드러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과 위로의 말을 잊지 않고 곁들이는 부분에서는 세상을 앞서 살아간 선배로서의 다정한 마음씀씀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우주인 김소연 씨가 비행 당시 남긴 짧은 다이어리를 통해 그가 겪었을 고충을 헤아리고 안타까워하는 장면에서는 마찬가지로 그간 여성 연구자로 겪어왔을 고충을 짐작하게 되는 한편, 미래에 우주비행사가 되어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고 싶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졸이는 것을 보면서는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심경’에 공감하게도 된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인상적인 업적을 남긴 이의 살아온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글 전반적으로 어떠한 자의식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과도하게 겸손하지도, 지나치게 오만하지도 않은, 타인과 비교하며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드러내지 않는, 단단한 자아와 인류를 비롯한 뭇 생명체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읽을수록 이렇게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단단하면서 따뜻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게 되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저자의 타고난 심성에 더해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지금의 그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까 거대한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영겁의 세월에 걸쳐 태어나고 사라지는 별의 생애와 비교하면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찰나이며, 어마어마한 우주라는 공간에서 지구라는 별과 거기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먼지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 화낼 일도, 슬퍼할 일도, 절망할 일도, 좌절할 일도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짧은 시간을 충실히, 그리고 다정히 살아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이 책을 펼쳐보려고 한다. 10년 전 어느날의 내가 문득 오로라를 떠올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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