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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영상의 은밀한 유혹

<월간 채널예스>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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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들은 소설 판권을 사들이고, 소설가에게 협업을 제안하고, 아예 그들을 고용한다. 돈의 흐름은 거의 일방향이다. 문학계가 영상업계에서 사람이나 콘텐츠를 사오는데 쓰는 돈도 있기는 있지만, 그 반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2021.05.03)

일러스트_이내
패트릭 맥길리건의 평전 
『히치콕』에는 앨프리드 히치콕과 동시대를 살았던 영미 소설가들의 이름이 여럿 나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레이먼드 챈들러, 대실 해밋,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대프니 듀모리에 등등.

히치콕은 듀모리에의 소설 『레베카』와 『새』를 원작으로 영화를 찍었다(그런데 히치콕의 영화 《새》와 듀모리에의 원작은 내용이 많이 다르다). 하이스미스는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히치콕이 영화로 만들어 히트시킨 덕분에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의뢰 받은 작가 중 한 사람이 해밋이었다. 그러나 해밋은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이야기가 별로라고 생각해서 제안을 거절했다.

챈들러는 수락했다. 한데 챈들러와 히치콕은 각색 방향을 두고 사이가 틀어졌고, 급기야 범죄 소설의 거장이 범죄 영화의 거장에게 술에 취해 폭언을 퍼붓기에 이르렀다. 히치콕은 말없이 자리를 떴고, 나중에 챈들러가 보내온 시나리오도 받지 않았다. 챈들러에 대한 히치콕의 평가는 이랬다. “저 자는 쓸모가 없어.”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은 영화 <구명 보트>를 만들 때 등장한다.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린 히치콕은 헤밍웨이에게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 헤밍웨이는 감사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고 답장했다. 헤밍웨이 다음으로 히치콕이 찾은 소설가가 스타인벡이었다. 스타인벡은 히치콕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고, 소설 형태로 트리트먼트(시놉시스와 시나리오 중간 단계)를 써보겠다고 했다. 전에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퓰리처상 수상자이고 나중에 노벨문학상도 받게 될 스타인벡이 열정적으로 써낸 중편소설 분량의 트리트먼트는 히치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치콕은 다른 극작가와 함께 이걸 엄청 뜯어고쳤다. 그래도 스타인벡은 챈들러에 비하면 신사였다. 다른 사람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는 했어도 히치콕과 싸우지는 않았다. 두 예술가는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 그럭저럭 어울렸다.

『히치콕』은 1228쪽짜리 책인데 이런 에피소드들 덕분에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같은 아이디어를 놓고 두 예술가가 완전히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는 모습도 흥미로웠고, 자신의 접근법이 부정당할 때 그들이 울분을 다스리는 방식도 내 얘기가 아니라 남 얘기여서인지 그저 재미있었다.

개인 차원이 아니라 업계 차원에서 두 분야가 맺은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세상에는 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는 소설가도 있고(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 문학 작품에서 악상을 얻는 음악가도 있다(예를 들어 슈베르트). 그러나 영화계와 소설계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가깝고 끈끈하다.

영화인들은 소설 판권을 사들이고, 소설가에게 협업을 제안하고, 아예 그들을 고용한다. 돈의 흐름은 거의 일방향이다. 문학계가 영상업계에서 사람이나 콘텐츠를 사오는데 쓰는 돈도 있기는 있지만, 그 반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반면 영화계가 제시하는 일거리는 일급 문인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고 신인 작가에게는 커리어를 바꿀 기회였다. 흑백 영화 시절부터 그랬다.

2021년 한국에서도 영상과 소설 양쪽에 발을 담그고 성취를 거두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화 《침입자》를 연출하고 소설 『아몬드』를 쓴 손원평 작가나 영화 《헬로우 고스트》의 감독이자 SF 소설 『곰탕』의 저자인 김영탁 작가가 대표적이다. 『고래』의 천명관 작가, 『자기 개발의 정석』의 임성순 작가, 『망원동 브라더스』의 김호연 작가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이미 영화인들이었다. 유쾌한 코지 미스터리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의 박연선 작가는 드라마 《연애시대》와 《청춘시대》의 각본가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글로 먼저 이름을 알린 이들이 영상업계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모습을 부쩍 자주 본다. 손아람 작가는 그의 소설이 원작인 동명 영화 《소수의견》의 각본을 썼고, 청룡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정세랑 작가도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메이드 인 강남』의 주원규 작가는 tvN 드라마 《아르곤》의 극본을 썼다. 이 드라마는 원작이 따로 없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영화나 드라마, 혹은 게임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라는 또래 소설가들의 소식을 좀 더 듣는다. ‘스토리 회사’나 게임 회사에 소속된 이도 있고 개인 프로듀서나 연출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위에 적은 손아람, 정세랑, 주원규 작가의 사례는 어쨌든 결과물이 나온 경우다.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조금 멀찍이서 이런 사례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일종의 역외(域外) 인재 채용처럼 보인다. 게임, 애니메이션 업계까지 포함해 영상콘텐츠업계라고 불러야 할 거대 산업이 재능 있는 이야기꾼을 찾는데 혈안이 된 듯하다. 그 산업이 벌어들이는 돈은 히치콕의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는데, 부의 원천은 예나 지금이나 창작자의 뇌이므로.

딱히 통계나 근거는 없지만 최근에는 드라마업계가 영화업계보다 소설가들을 더 열심히 물색하는 느낌이다. 내가 만난 프로듀서들의 설명은 이러했다. 첫째, 한국 드라마의 장르와 소재 폭이 넓어지면서 프로듀서들이 기존 작가군에서 외부 스토리텔러로 눈을 돌리게 됐다. 둘째, 작가가 연출자보다 우위에 있는 한국 드라마 제작환경을 바꾸고 싶어 하는 프로듀서들이 많다. 셋째, 인기 드라마 작가들의 몸값이 너무 높아졌다.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기괴한 현실이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며 분투 중인데 이토록 커다란 미스매치가 존재한다. 영상업계와 문학계에서 작가들의 데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영화 제작자들이 왜 공모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지 등에 대해서는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에 취재해 쓴 바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일러스트_이내

나도 영상콘텐츠업계로부터 이런저런 제안을 받았다. 내 소설을 직접 각색해보지 않겠느냐는 평범한 제안도 있었고, 스타인벡이 받은 의뢰처럼 감독의 아이디어를 함께 개발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내 소설 속 어떤 설정을 시리즈가 될 수 있게 더 키워보자는 이도 있었다. 스타인벡과 히치콕이 합의한 방식처럼 소설 형태로 트리트먼트를 쓰면 된다는 제안도 있었는데, 미니시리즈로 만들기 쉽게 글을 16개 챕터로 구성하면 된다고 했다. 대사만 전문적으로 잘 다듬는 다른 방송작가를 붙여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스타인벡은 결코 받지 않았을 요청도 받았다. 게임 세계관 개발 같은 것이다. 마블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로는 ‘유니버스’ 개발 의뢰를 받는다. 영화, 드라마, 웹드라마, 웹툰, 웹소설, 게임,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여러 매체에서 서로 내용이 이어지는 미디어믹스 프랜차이즈의 밑바탕을 짜보자는 것이다. ‘한국의 마블’을 꿈꾸는 이들이 참 많다.

그런 제의 중에는 큰돈이 걸려 있는 것도 있었고, 해보면 재미있겠다 싶은 것도 있었다. 아내가 해보라고 권한 것도 있었고, 한동안 고민한 건도 있었다. 끝내 영상콘텐츠업계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꽤 만났다. 영화사, 방송국, 포털 사이트, 엔터테인먼트 기업, 애니메이션 회사, 스토리 회사에서 일하는 연출자,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들이었다.

고백하자면 그런 만남 자체가 좀 즐거웠다. 참석자들의 지성이나 선량함과 관계없이, 문학출판계 인사들이 모이면 거기에 어쩔 수 없이 패배주의적인 분위기가 깃드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안 읽고, 우리가 뭘 해도 그런 추세는 바뀌지 않을 거야, 뭐 그런. 신문기자들을 만나도 비슷한 공기다.

그러다 영화나 드라마업계의 기획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씩씩함이 반갑다. 벌이고자 하는 모험의 규모도 크고 도전의 성격도 신선하다. “이거 제작비 건지려면 중국을 잡아야 해요”라든가 “한국에서 아무도 안 해본 장르니까 제가 해보려고요” 같은 말들을 스스럼없이 한다. 영상업계에서 일하게 된 한 소설가는 주변 사람들이 너무 거칠다고 촌평했는데, 나는 반대로 문학출판계 인사들이 다소간 식물성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그렇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 웹툰, 게임 산업이 최근에 거둔 성취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나는 5년쯤 전에 한 프로듀서로부터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속으로 황당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K-콘텐츠들이 넷플릭스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됐다.

물론 그 판에는 말만 번드르르한 치들도 있다. 서류 몇 장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의 돈으로 대박을 노린다는 점에서는 부동산 개발업과 닮았다. 한탕주의 경향은 영화계가 드라마계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 한다. 드라마는 아무리 망해도 최소한의 광고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이라나. 그리고 공평을 기하기 위해 덧붙이는데, 무능하고 무책임한 자칭 기획자들은 출판계에도 정말이지 차고 넘친다.

워낙 영상 문법에 무지한 터라 영화와 드라마업계 관계자들과 길지 않게 대화하면서도 배운 바가 많았다. 예를 들어 나는 이전까지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들이 유의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영화적’이라는 말도 단순히 시각적인 묘사가 자세하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의 합과 호흡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거실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TV를 보는 경우가 많고, 화면 속 이야기가 지루하다 싶으면 리모컨으로 금방 채널을 돌릴 수 있다. 그러니 TV 화면은 시청자들의 주의를 끊임없이 끌고 다음 장면을 계속해서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 캐릭터들의 ‘티키타카’가 이래서 중요하다.

반면 영화관의 관객은 객석에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신세이고, 그들 눈앞에는 커다란 스크린과 어둠뿐이다. 그래서 영화감독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여유가 있고, 걸출한 감독은 길고 느리고 조용한 롱테이크도 밀어붙일 수 있다. 대신 영화는 드라마보다 플롯이나 설정, 세트, 미술이 훨씬 더 정교해야 한단다. ‘이거 가짜다’라는 생각이 한번 머리에 떠오르면 관객이 다시 화면에 집중하는데 시간이 걸리기에.

이런 사항들을 배우면서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영화감독도 드라마 PD도 이반 카라마조프의 장광설을 영상에 담으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핵심이 그 장광설이다. 영화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문학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보여주기가 아니라 말하기가 소설의 진짜 힘이고, 소설이야말로 사유와 사변을 담는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상업계 관계자들을 만난 뒤로 나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길게 웅변을 하거나 한 문제를 골똘히 고민하는 장면을 집어넣는 것을 더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의 소설 쓰기는 이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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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강명(소설가)

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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