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4월 우수상 - 멋쟁이 할머니들
내 인생의 롤모델
외국 여행을 가면 눈길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들이다. (2021.04.06)
외국 여행을 가면 눈길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들이다. 일본의 한 미술관에선 레이스 달린 멋진 모자를 쓴 할머니들이 소녀처럼 소곤소곤 대화하는, 매너 있고 예의 바른 모습이 귀엽고 좋아 보였다. 스위스 할머니는 기차역에서 길을 묻자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자신의 가방에서 다급히 안경을 꺼내 쓰고는 이제 도와줄 수 있다며 내 말을 경청해주셨다. 유럽의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일정에 착오가 생긴 걸 알고 안절부절 못할 때도 뭐 도와줄 게 있느냐며 맞은 편에 앉은 이방인에게 먼저 말 걸어주는 이는 꼭 할머니들이었다.
부강하고 복지가 잘 된 나라는 할머니들의 차림새가 단정하고 표정이 밝은 반면 경제가 어려운 나라에선 삶의 무게를 다 짊어지고 사는 듯한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과 느린 걸음이 애잔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여러 할머니들을 지켜본 이유는 뭘까 생각해봤다.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도사리고 있는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면 좋을 지를 묻고 있었다.
20대 초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라는, 남섬의 한 도시에서 반년 동안 머물렀다. 어학원을 등록하고 현지인 홈스테이를 선택했는데, 백발의 할머니 진 데비(Jean Davy)의 집으로 정해졌다. 그녀는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주 후 아들과 딸을 결혼 시킨 후 홀로 살면서 홈스테이 호스트로 수입을 벌며 '알피'라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스스로를 '퀸'이라고 불러 달라며 우아함과 자신감을 보여줬던 진. 진의 가장 멋진 모습은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드릴과 망치를 들고 정원에 놓을 큰 벤치를 손수 만들던 모습이었다. 진은 돋보기 안경을 쓰고 느리지만 꼼꼼하게, 철심을 박은 다리를 절뚝이며 결국 완성해냈다. 나중에 손녀가 와서 강아지와 그 벤치에 앉는 걸 보며 흐뭇해하던 그 모습이 아련하다.
영국 팝 가수 로비 윌리암스를 너무 좋아해서 뉴질랜드 콘서트에 딸과 손녀와 함께 가 열광하며 소리 질렀던 무용담을 생생하게 전해줬을 때는 이 할머니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진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만 내 기억 속의 진은 경제적 안정 속에서 매일 재밌는 일로 바쁘고 매사에 흥미를 느끼는 할머니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20대 중반, 여행중에 할머니들에 대한 관찰은 계속됐다. 유럽을 혼자 여행할 때는 기차를 주로 탔는데 자주 이동하다 보니 정액권을 끊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다만 만으로 25세 이상이면 1등석을 구입해야 해서 형편에 맞지 않게 호사를 누렸다. 20대에 타 봤던 유럽 기차 2등석의 시끌벅적하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와 달리 1등석은 비즈니스 공간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좋은 경치도 보고 책도 읽고 여유를 부리며 기차 여행을 즐기던 중, 대각선 방향으로 4명의 서양인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마주 보며 테이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선남 선녀들이 기차 이동 시간을 쪼개며 일하는, 지적인 분위기가 멋져 보였다. 특히 상큼한 금발 단발머리에 꼿꼿한 자세로 앉은 뒷모습의 여성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 금발의 여성이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걷는 뒷모습마저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얼굴이 궁금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그녀의 앞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봐도 그 얼굴은 60대 중반을 훌쩍 넘은 노인의 얼굴이었다. 30대 쯤 돼 보이는 젊은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업무를 교류하는 모습, 자신감 넘치는 자세와 스타일 모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장면이다. 그 후 30대 초반이 됐을 때도 여행 중에 내 눈길은 여전히 할머니들에게 머물렀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점심을 먹은 어느 날. 모처럼 햇빛이 좋아 야외 카페 테라스에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현지에 부임하고 있던 한국 신부님을 뵙고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저만치 혼자 앉은 한 할머니에게 또 눈길이 갔다. 그 할머니는 핏이 잘 맞는 정장 차림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신부님께,
"저 정장 차림의 할머니, 너무 멋지지 않나요?
전 할머니가 됐을 때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신부님은-
"지금부터 그렇게 사세요. 그럼 어느새 나중에 저렇게 돼 있을 겁니다"
정답이었다. 내가 매력을 느낀 건 그 할머니의 인생이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정장 입고 커피 마시며 신문을 읽은 들 저 아우라가 나올 리 만무했다. 저 할머니의 우아한 삶이 저 한 장면으로 설명되고 느껴질 정도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 없는 것이었다.
내가 닮고 싶었던 멋쟁이 할머니들의 공통점은 매일 생기 넘치는 하루를 살았다는 것. 그 하루를 모아 행복한 인생을 꾸려왔다는 것. 남을 배려하면서 예의를 지키되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고 매 순간 유머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로 가끔 내 모습을 비춰본다. 그 닮고 싶은 모습과 오늘의 내 하루가 많이 멀어져 있는 건 아닌 지.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주변을 돌보고 미뤄뒀던 일을 꺼내본다. 그렇게 건강하고 재밌게 살다 보면 언젠가 내 모습도 잠시 스쳐 지난 누군가의 롤모델이 돼 있지 않을까?
김정은 정성스럽게 글을 고치면서 가볍게 뱉었던 말들을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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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럽게 글을 고치면서 가볍게 뱉었던 말들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