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노블 특집] 그래픽노블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했을까
<월간 채널예스> 2021년 3월호
2021년 예스24에서 그래픽노블로 검색된 책은 모두 1200건이 넘는다. 그래픽노블은 애초에 슈퍼히어로의 시대에 태어나 그들이 쓰지 못한 역사를 다시 쓰는 장르로서 톡톡히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2021.03.09)
1970년대 미국의 주류 만화 시장을 주름잡던 건 코믹북이었다. 그 내용과 형식은 천편일률적이었다. DC나 마블의 슈퍼히어로가 주로 등장해 급하게 사건을 해결하고 서둘러 사라져버리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완성도 있는 드라마가 되지 못했다는 것. 이 대목에서 세계 만화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더 스피릿』의 작가 윌 아이스너가 등장한다. 그는 코믹북의 빈틈에 구성과 연출을 더해 서사를 만들었다. 완결된 이야기의 세계를 그려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만화 창작자인 동시에 만화 이론가였던 아이스너의 만화 미학 덕분에 만화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이라는 단계에서 작가의 실험이 담긴 예술로 도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도약에 맞는 새로운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다. 바로 그래픽노블. 1978년 아이스너의 『신과의 계약 A Contract with God』은 최초의 그래픽노블이다. 모든 예술이 자기 시대와의 싸움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픽노블 역시 만화의 인정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게 시작된 그래픽노블 반세기에 이르러,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가 그래픽노블로는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작에 오른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심사위원들은 『사브리나』를 두고 “좋은 픽션이 해야 할 것들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평했는데, 좋은 픽션이 해야 할 일들이란 언제나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법. 그러므로 맨부커상 후보작 선정이라는 ‘사브리나 사건’은 그래픽노블 혹은 만화가 거머쥔 정당한 보상이라 할 만하다. 드르나소는 『사브리나』 이전에 이미 『베벌리』로 「LA 타임스」 ‘최고의 그래픽노블상’,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 그래픽노블이 등장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코믹북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윌 아이스너류의 그래픽노블이 뒤섞여 있었다. 시공 그래픽노블은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완성도 높게 구현한 작품에 공을 들였고, 미메시스 그래픽노블은 『폴리나』, 『염소의 맛』 등으로 단시간 내 유럽을 평정한 바스티앙 비베스나 그래픽노블의 실험성을 확장시킨 『여기서 Here』의 작가 리처드 맥과이어 등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만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의 변화도 이때 일어났다.
그리고 2020년 우리나라 그래픽노블 출판계에도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 『풀』이 ‘만화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하비상을 거머쥔 것. ‘평화발자국’ 시리즈로 출간된 이 작품은 일본 위안부로 끌려간 이옥선 할머니의 생애를 흑백의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12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지난해 출간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알렉산드리아의 비극적 생애를 그려냈다. 불행한 시대와 싸운 혁명가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의 삶은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적 특장점 때문에 훨씬 더 인상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들이 역사의 장엄함을 몸으로 겪은 인물을 재조명하고 있다면, 우리 시대의 가장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도 있다. 평화발자국 시리즈의 또 다른 그래픽노블 『문밖의 사람들』은 파견 노동과 같은 청년들의 노동 현실을 다룬다. 2014년 세상에 충격을 던진 만화계 성폭력 사건을 다룬 『나, 여기 있어요』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쓰고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폭력에서 살아남아 법정에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다. 이제야 비로소 가능해진 작가의 자기 회복인 동시에 만화의 사회적 성찰이라는 두 가지 맥락을 모두 지닌 작품인 셈이다.
이동은 작가가 쓰고 정이용 작가가 그린 『진, 진』은 20대 진아와 40대 수진의 일상을 통해 각자 자기의 삶을 어떻게 견디고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섣부른 위로를 건네는 대신 우리의 삶 도처에 있는 고통과 불안을 덤덤하게 풀어내는 방식으로 만화가 할 일을 한다. 그 밖에도 『혼자를 기르는 법』, 『우두커니』, 『여름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 『여가생활』, 『다시 오름』 등의 작품이 작가들의 개성적인 그림체와 맞물려 한국 그래픽노블의 다양성에 채색을 더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본다면, 그래픽노블은 애초에 슈퍼히어로의 시대에 태어나 그들이 쓰지 못한 역사를 다시 쓰는 장르로서 톡톡히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책을 봐도 만날 만화나 보고 있다!” 우리는 이 말에 담긴 뉘앙스를 모두 알고 있다. 여기에는 매우 적나라한 폄하가 있다. 하위문화 장르로서의 만화는 대개가 ‘만화나’라는 식으로 호명되어왔다. 이제는 책을 내도 만화나 내는 중이다. 2021년 예스24에서 그래픽노블로 검색된 책은 모두 1200건이 넘는다. DC와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이 등장하는 그래픽노블도 압도적으로 눈길을 끌어당기지만, 한편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생애와 사상이, 유발 하라리의 인류 이야기가 그래픽노블로 재탄생하고 있다. 그림에 의지하지 않는 상상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호쾌한 증명이다. 만화의 시대에는 미처 그러지 못했던 출판계의 저돌적 구애인 동시에!
그 밖에도 『혼자를 기르는 법』, 『우두커니』, 『여름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 『여가생활』, 『다시 오름』 등의 작품이 작가들의 개성적인 그림체와 맞물려 한국 그래픽노블의 다양성에 채색을 더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본다면, 그래픽노블은 애초에 슈퍼히어로의 시대에 태어나 그들이 쓰지 못한 역사를 다시 쓰는 장르로서 톡톡히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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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드르나소> 글그림/<박산호> 역19,200원(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