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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주의 그래도, 서점] 다정이 다정을 만드는 겨울
<월간 채널예스> 2021년 2월호
이튿날 L은 서점을 방문하여 평소 좋아하던 책 두 권에 편지를 넣어 보냈다. K도 다시 박스를 보내왔다. 편지도 역시. L은 심지어 운명을 느꼈다. (2021.02.02)
“와! 마니또가 뭔지 모르는 걸까?”
찌그러진 택배 상자를 들고 혼잣말을 했다.
연말에 서점에서 책 마니또 이벤트를 했다. 우울해 할 수만은 없다. 재미난 일을 직접 만들자는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했다. 영화 <북 오브 러브>는 헬렌 한프의 책 『채링 크로스 84번지』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는 영국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서점으로 책을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책방 관리인 프랭크 도엘과 헬렌 한프는 20년이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책과 취향과 우정을 나누었다. 현실 속 마크스 서점은 사라졌지만 영화 <북 오브 러브>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장소로 남아 있다. 전세계 사람들이 편지를 써서 채링크로스 84번지로 보냈다. 관리인은 편지들 중 짝이 될 만한 두 사람을 연결하여 주었다. 지아오와 다니엘, 마카오와 LA 사이로 책과 편지가 오고 간다. 더불어 사랑도. 우리가 한국의 마크스 서점이 되면 어떨까? 일주일이라도 근사할 듯했다.
“책 마니또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같이 할 분을 찾습니다.”
반나절도 안 되어 100여 명이 신청을 했다. 관리도 하고 택배비도 내야 하니 10명만 책 마니또 1기로 뽑았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절반은 단골로 채웠다.
“덕분에 연말이 두근두근하네요. 책과 편지를 서점으로 보내주세요. 도착하는 순서대로 크로스해서 보내겠습니다.”
10명에게 메시지와 메일을 보내는데 설렜다. 상자들이 도착했다. 1번 2번 상자는 정갈했다. 1번 상자를 2번에게, 2번 상자를 1번에게 보냈다. 다음 날 인증샷이 올라왔다. 서점 계정에 공유하니 댓글이 달렸다. ‘왜 내가 두근두근하죠?’ ‘모처럼 즐거워요’ ‘다음엔 저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밤이 달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4개의 박스가 도착했다. 3번 참가자는 M사에서 음식을 주문했던가 보다. 5번 참가자는 최근 마트에서 라면을 한 상자 배달시켰고. 재활용은 좋은데 찌그러진 상태가 심했다. 구멍도 났다. 초등학교 때 하던 마니또 생각을 한 게 잘못이었다. 마니또 시즌이 되면 매일 아침 교실문을 열자마자 책상으로 달려갔다. 서랍에 손을 깊이 넣어 더듬더듬하다가 뭔가 걸리면 표정이 환해진다. 초콜릿, 예쁜 펜, 정성껏 포장된 책, 머리핀과 꼼꼼히 쓴 편지. 기뻐하다가 ‘앗. 설마 지금 마니또가 날 보고 있는 거 아닐까?’ 싶어져서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마니또는 선물만 주지 않고 다정함도 줬다. 무거운 걸 들고 낑낑대는데 누군가 달려와서 같이 들어준다면? 내 마니또일 수도 있다. 보통 겨울 방학 전에 하곤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일찍 온 듯 두근거렸다. 등교길이 즐거웠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 감성과 정성은 20세기에 끝난 것인가. 깨끗하지 못한 박스를 보며 한숨 쉬는데 다이렉트 메시지가 들어왔다.
“적당한 박스가 없어서 집에 있던 걸로 보냈는데 너무 누더기라 보내놓고 마음이 안 좋아요. 정 서점님, 잘 좀 부탁할게요.”
으이그 으이그하면서 내용물을 꺼내 깨끗한 박스에 담았다. 교차해서 보낼 상자도 같은 걸로 맞춰 보내기로 했다. 보낸 사람 이름이 익숙하다. 수원에서 연남까지 종종 꽃을 들고 찾아오는 청년이다. 꽃을 든 남자라고 불렀더니 20세기적 표현이라며 옆에 있던 단골이 놀렸더랬다. 우리 서점에선 남자 여자 구분 짓지 않고 사람만 있기로 했는데 20세기 광고 카피까지 끌어왔으니 놀림 받아 마땅했다. 노란 박스에 리본이 묶여 있다. 손편지도 들었다. 두 상자에 서로의 주소를 붙여 보냈다. 다음 날 인증샷이 올라왔다. 꽃을 든 그분은 자신이 보낸 것에 비해 몹시 단출한 선물을 받았지만 기뻐했다. 노란 박스를 받은 분은 내용물을 찍어 올렸다. 선현경 님의 『하와이 하다』라는 책과 핫팩, 손난로, 눈팩, 비타민 등등 알뜰살뜰하다. DM이 왔다.
“너무 성의없이 보낸 거 같아 마음이 쓰였는데 정성 가득한 선물을 받고 보니 한 박스 더 보내드리고 싶어졌어요. 저, 편지 써서 서점 가도 돼요? 책 새로 사고 편지 넣어서 다시 보낼래요.”
노란 상자에 들어 있던 따뜻한 것들 덕분에 한 사람이 마니또가 뭔지 제대로 알게 됐다.
L은 K와 짝이었다. 근처에서 근무하는 단골이라 마침 지나는 길에 직접 책을 받아왔는데 쇼핑백 안에 먹고 버린 사과즙 봉지가 들어 있었다.
“응? 이거 뭐예요?”
“죄송해요. 옆자리 차장님이 범인인 거 같아요. 책상 아래 놨더니 쓰레기통인 줄 아셨나 봐요.”
으이그 으이그 하면서 책을 깨끗이 닦아 K에게 보냈다. K의 선물도 다음날 L에게 도착했다. 메시지가 왔다.
“L이에요. 마니또 님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펑펑 났어요. 저, 요즘 많이 지쳤었나 봐요. 진심으로 위로가 됐고 덕분에 마음이 좋아졌어요.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요. 답장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이튿날 L은 서점을 방문하여 평소 좋아하던 책 두 권에 편지를 넣어 보냈다. K도 다시 박스를 보내왔다. 편지도 역시. L은 심지어 운명을 느꼈다.
“일회용 카메라가 들어 있었어요. 요즘 필름으로 사진 찍는데 취미 붙였는데 마니또 님이 저랑 취향이 비슷한가 봐요.”
L은 누군지 모르는 K를 상상했겠고, 나는 L의 표정을 짐작해봤다. 빛나고 있겠다. 적어도 회사 앞에서 만난 불 꺼진 방 같은 얼굴은 아니겠다.
꽃을 든 그분이 보낸 핫팩을 생각한다. 잠시 따뜻했으나 이내 식을 테다. K이 보낸 편지를 생각한다. 위로받았지만 회사 생활은 여전히 팍팍할 테니 L은 또 지칠 테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다정이 다정을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 계속 다정한 일을 만들다 보면 혹독한 날도 어디선가는 끝이 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촛불을 켜라는 말.
작은 불빛이면 된다. 모든 어둠을 이길 수 있다.
조그마한 다정이면 충분했다.
서점에서 우리는 반짝이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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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남동에서 서점 리스본과 포르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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