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정지돈 소설 독서법’에 관하여
<월간 채널예스> 2021년 2월호 / 장편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소설은 ‘정지돈 소설 독서법’으로 읽어야 제맛이다.(2021.02.01)
소설가 정지돈은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의 주인공 정웰링턴을 2015년 처음 알게 된다. 그 후 6년간 『모든 것은 영원했다』 참고 목록에 있는 약 85권의 책을 읽으며 정웰링턴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탐구하고 습득했다. 기억하고 싶은 책 속 구절들이 몸에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들을 하나 하나 컴퓨터에 옮겨 적으며. 약 3~4페이지를 한 단위로 조각조각 펼쳐진 정웰링턴의 이야기를 한 번에 읽으려 한다면 당신은 어느덧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정지돈 소설은 ‘정지돈 소설 독서법’으로 읽어야 제맛이다. 한 단락, 아니면 한 문장만 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읽고 멈추기를 반복해도 좋고, 건너뛰고 싶은 부분은 건너뛰고, 읽고 싶은 부분만 반복해서 읽어도 좋다. 정지돈의 지적인 세계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정지돈 소설 독서법’으로 그의 소설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모든 것은 영원했고 정지돈은 눈부실 것이다.
정웰링턴이 주인공입니다. 그의 어떤 부분에 관심이 갔나요?
우선 정웰링턴이 언급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처음 정웰링턴을 사진으로 봤을 때 잘생겼더라고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옛날 분인데 옛날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 왠지 모르게 가까운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에도 언급하긴 했는데, 정웰링턴은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죠. 정웰링턴은 어머니, 외삼촌, 할아버지처럼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신분 때문에 자신이 원했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지 못했고, 연구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 상황에 관심이 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웰링턴의 불능은 그가 가진 가장 적나라한 능력이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웰링턴을 불능하게 한 시대는 어떤 시대였나요?
정웰링턴은 68혁명 직전인 1963년에 사망합니다. 1940~1950년대 사람인 정웰링턴이 그 시기, 세계대전이 끝나고 68혁명을 가능하게 한 열망이 올라오기 전에 있었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나 68혁명은 자료가 엄청 많아요. 그런데 그사이 시대는 자료가 별로 없어요. 극적이지도 않고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책에서도 가볍게 다루고 본격적으로 다루는 역사서도 없고요. 역사나 혁명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 시대가 궁금하더라고요. 러시아혁명이 있었고 아방가르드가 나왔고 스탈린이 나타나서 1930년대에 대숙청을 했잖아요. 대숙청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10년, 20년 동 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 이후 지지부진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시기가 더 궁금했습니다. 그 시절의 미학이나 혁명 시기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보다 거기서 비켜난 사람들을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있으신 것 같아요.
혁명이라는 개념은 고등학생 때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됐습니다.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 싫었는데, 혁명이 일어나면 더 이상 안 다녀도 될 것 같더라고요. 대학도 안 가도 되고. 물론 오해였지만 아무튼 시작은 그랬어요.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는 어떻게 읽게 되셨나요?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김두식 교수님이 책이 정말 좋다고 하시면서 추천하셨어요. 2015년에 나오자마자 읽었어요. 그때부터 정웰링턴에게 꽂혀 관련 책들을 읽다가 소설을 쓰게 됐죠.
‘미래를 전망함’ 챕터가 있습니다. 이 챕터를 읽은 후, 소설을 다시 읽으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더 좋다는 말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에요.
정웰링턴과 그의 아내 안나, 선우학원 등 소설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미래를 전망함’ 챕터에서 마치 작가와도 같은 ‘나’라는 화자가 나와서 서술합니다. 이런 구성은 처음 본 거 같아요. 이런 구성을 취하신 의도가 있나요?
저는 소설 쓸 때 계획을 안 세우거든요. 이 소설은 계간지 『문학과 사회』에 연재했는데, ‘미래를 전망함’이 네 번째 파트였어요. 계획을 세우진 않지만 머릿속에서는 세 번째까지와 동일한 형식으로 쓰는 걸 생각했는데 안 써지더라고요. 계속 안 써져서 펑크도 한 번 내고, 그다음 호 다가올 때도 안 써지다가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네 번째 파트가 써지기 시작한 거 같아요. 의도와 이유 전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본능적으로 쓴 거 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는지 찾아가면서 그 안에 이야기를 넣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자료를 읽고 소설을 쓰시잖아요. 읽는 양이 굉장히 많으셔서 읽은 걸 기록하는 나름의 기술이 있을 것 같아요.
무식하게 합니다.(웃음) 종이책으로만 얘기하면 자료들을 읽으면서 표시를 해둬요. 그래서 가능하면 책을 사서 보는데, 책 귀퉁이를 접고 중요한 부분에 줄을 치거나 하면서 표시를 하고, 이후에 다 본 책이 어느 정도 쌓이면 PC에 메모한 부분을 옮겨 적어요. 옛날에는 그렇게 표시한 부분 대부분을 PC로 옮겨 적었어요. 지금은 다는 못 하고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하고 있어요. 옮겨 적는 것은 다시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좀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일종의 복습처럼 잘 스며들게 하고 싶어서예요. 나한테 있었던 일은 어제 뭘 했고 어땠고 등 그냥 얘기할 수 있잖아요.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쓸 때 내 얘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기 위해 쓰는 거 같아요.
자료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그 인물을 알 것 같다는 확신이 들 듯도 합니다. ‘빙의’라는 말이 있기도 한데, 정웰링턴의 경우에는 어땠나요?
제 문학관, 예술관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독자들이 어떻게 느끼실지 잘 모르겠는데 저는 그 인물이 된다거나 빙의를 한다거나 이런 말을 경계하고 안 좋아해요. 폄하해서가 아니라 전 작가가 무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개인인 작가가 고유한 내가 있어서 나를 지켜야 하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개인의 자아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타자의 영향, 사회 문화적 영향들이 다 겹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어떤 인물이 따로 있어서 그 인물에 빙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정체성과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과 시대 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데 그 사람과 내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면, 왜 그럴까 탐구하게 되죠.
집에 책이 많을 거 같아요. 특별히 아끼는 책이 있나요?
제가 어떤 시기에 읽고, 많이 접혀 있고 많이 표시한 책에 마음이 가는 거 같아요. 지금 떠오른 책은, 제가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즈음에 읽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에요. 여러 번 읽고 많이 표시해두었어요.
그 책을 여러 번 읽은 이유가 있을까요?
어떤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문제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정립하는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제가 얻은 교훈은 하고 싶은 일, 스스로가 즐거운 일을 해도 된다는 응원이었던 것 같아요. 책을 읽을 당시에 직장인이었는데 회사를 그만두는 데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회사 그만두고 한동안 고생을 하긴 했지만요.
본격 장편소설은 처음이세요. 호흡이 더 긴 글을 쓰는 과정이 어떠셨어요?
길다.(웃음) 장편을 더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런데 현실적인 여건은 장편을 쓰는 것이 갈수록 더 힘들고 읽기도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요. 더구나 저처럼 쓰는 경우에는 누가 읽겠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어쨌거나 욕심이 있고 더 많이 더 길게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 복권에 당첨되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번 소설을 쓰시면서 궁극적으로 가졌던 목표가 있을까요?
아마… 완성? 소설을 쓸 땐 늘 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두려움과 맞서 글을 써나가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편집자 이외에 최초의 독자가 있나요?
우선은 제가 최초의 독자입니다. 그다음은 오한기 소설가, 금정연 서평가, 이상우 소설가. 이 세 분이 제 소설을 자주 먼저 읽었죠. 글마다 조금씩 다른 거 같긴 한데 어느 순간 한 번씩은 꼭 보여주게 됐어요. 『모든 것은 영원했다』는 연재할 때 첫 번째 원고를 보여줬어요. 200매라고 하면, 200매를 모두 쓰고 보여준다기보다 처음 50매, 100매를 썼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쓴 것이 맞을까, 두려운 시기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 보여주는 것 같아요.
금정연 서평가는 첫 번째 연재 원고를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쓰고 있는 동안에는 비판받는 것을 싫어해요. 비판받을 게 없어서가 아니에요. 그건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글을 쓸 때 확신이 없고 고통스럽고 힘들 때 원고를 읽어 달라고 보내는 것이어서 비판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너지게 돼서 못 쓰게 되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신랄하게 듣는 것이 지나고 보니까 제가 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 자신도,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조건 칭찬을 하고 그다음에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굉장히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편이거든요. 그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극찬을 하고 시작해요.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서로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을 거 같아요. 정연 씨가 보낸 메일을 찾아볼까요? 메일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돈 씨 소설이 제게 살아갈 희망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내 삶을 구했어요. 걱정 마시고 계속 쓰세요. 저와 다른 독자와 세계를 위해.”
너무 설레는 말이네요. 금정연 서평가와는 어떻게 친해지셨어요?
등단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저랑 정연 씨 사이에 누군가가 계셨어요. 번역도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트위터로 같이 보자고 하셔서 봤어요. 처음 만난 날 밤새도록 얘기를 한 거 같아요. 술도 한잔 안 마시고 밤 10시부터 아침 9시까지. 할 얘기가 너무 많았던 거예요. 대부분 한국문학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그런 얘기를 하면서 친해진 거 같아요. 정연 씨가 좋은 이유는 너무 예의 바른 사람이라서? 예의 바른 사람이라서 쉽게 가까워지게 된 거 같아요.
‘예의 바르다’라는 건 어떤 걸까요?
제가 성격이 약간 이상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지금도 정연 씨와는 서로 존댓말을 해요. 아무리 가까워져도 서로 말을 놓지 않아요. 사실 불편할 수 있잖아요. 정연 씨가 두 살 위예요. 저는 정연 씨라고 부르고 정연 씨는 저를 지돈 씨라고 불러요. 그런데 전혀 불편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씨’라고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면 선이 생기고, 반말을 하거나 형이나 누나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 힘들고 입에 붙지 않아요. 저보다 어린 분들이 저에게 ‘~씨’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고, 뭐라고 부르건 자유롭게 하면서 선을 지키면 될 거 같은데 그런 방식이 저랑 잘 맞았던 거 같아요.
소설가라고 하면 보통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를 생각합니다. 작가님 소설은 흔히 얘기하는 서사가 강조된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님은 왜 소설을 그렇게 쓰시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으실 거 같아요.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어떤 때는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열심히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제가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제 소설의 문제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점이에요.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요. 소위 서사가 없다는 말이 일종의 레토릭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파편적이다”, “서사가 없다”라는 말을 어느 순간 어떤 평론가가 어느 시기에 쓰면서 독자들에게 전염이 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레토릭처럼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많은 작품임에도 없다고 받아들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야기가 너무 많다’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내 소설은 서사의 구조가 다르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구조나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주류적인 소설의 구조는 연극에서 가져온 방식이에요. 클라이 맥스가 있고 인물, 전개, 배경이 확실하게 있습니다. 연극적 구성이 갖는 힘이 강력하고, 그 강력한 힘이 소설이라는 장르적 형식에 굉장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구조를 따르지 않아도 이야기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하고 인물도 풍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익숙하지 않은 구조이고 읽는 방식이 다른 거죠. 공연 같은 경우에는 두어 시간 몰입해서 시간도 잊게 만들잖아요. 이런 구조가 아닌 소설들은 다른 읽기 방식이 있습니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누가 나에게 시간을 정 해 주지도 않고 원하는 부분을 펴서 읽을 수도 있고, 이런 자유로움이 있지요.
그런데 소위 페이지터너라고 하죠, 그것이 가져다주는 힘이 너무 강력하니까 거기에만 중요성을 두고, 아까 말한 그런 표현들이 생기고 오해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어디서든 멈출 수 있고 어디서든 다시 읽어도 되고 어디에나 임의 접속할 수 있는 특성 때문 이거든요. 그래서 영화도 극장에서 볼 때보다 집에서 보는 것을 더 좋아해요. 그런 독서에 어울리는 소설은 이야기가 조각 조각 많은 책이에요. 4페이지가 하나의 이야기로 차 있을 때 그런 독서에 잘 맞습니다. 다만, 그런 소설은 주욱 읽으면 어느 순간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어디서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확 날아가 버리는 특성이 있어요. 다른 독서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지돈의 소설을 좀 더 즐기고 싶은 사람을 위해 정지돈 소설 독서법을 알려주신다면요?
한 단락, 아니면 한 문장만 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읽고 멈추기를 반복해도 좋을 것 같아요. 건너뛰고 싶은 부분은 건너뛰고, 읽고 싶은 부분만 반복해서 읽어도 되고, 원하는 부분을 펼쳐서 그냥 읽어도 되고요. 뒷부분을 먼저 읽고 앞을 읽어도 상관없는 그런 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지돈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지적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에 대한 작가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허영심이라는 것이 없을 수 없고, 그 허영심이 일종의 욕망인데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발현되느냐에 따라 나쁘게 될 수도 있고 좋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지적 허영심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고 좋은 것이 없지 않나요? 저는 대부분의 것이 허영심에서 시작한다고 보거든요. 그것을 허영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려는 것을 허영이라고 하겠죠. 호기심은 그냥 알고 싶은 것이고요. 지적 허영심은 혼재되어 있는 거 같아요. ‘저 작가가 특이한 거 같아, 내가 모르는 걸 이야기해. 그래서 내가 읽고 싶어. 있어 보여.’ 이건 호기심인 거죠. 그 호기심으로 알면 알수록 그 장르의 상황에서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장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알게 되고 그걸 이해하면 자신의 이해 폭이 훨씬 넓어지고 또 스스로가 즐겁기도 하고요. 그렇게 본다면 지적 허영은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적 허영으로만 끝날 수도 있지만, 그게 있어야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제 작품을 읽는 사람은 지적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얘기한다면 저는 영광이지요. 자신이 파고들거나 좋아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이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계신 라이프북스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득 정지돈의 소설이 그 포지션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광이지만 그런 포지션에 있다면, 책을 팔아서 먹고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슬프네요.(웃음)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상 받았을 때?
상 받을 때는 별로 기쁘진 않았어요. 쑥스럽고 많은 생각이 들었지요. 기본적으로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가 일종의 롤러코스터 같아요. 매일 소설을 몇 페이지씩 쓰고 있는데 오늘 글이 너무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요. 정말 날아갈 거 같아요. 제가 사는 곳이 한강 근처거든요. 소설이 잘 써진 날 한강을 산책하면 기분도 아주 좋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요. 그다음에 그 글을 다시 보면 ‘어떡하지? 왜 그렇게 못 썼지? 그다음에는 어떻게 쓰지?’라는 마음이 들고 너무 고통스러워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뭔가를 썼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가장 큰 기쁨인 거 같아요.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취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같아요. 그 감정이 책이 출간됐을 때 느껴지진 않는 거 같아요. 글이 써졌을 때 느껴지고 그것이 작게 왔다가 사라지고 왔다가 사라지고, 그렇습니다. 일종의 중독 같은 걸까요?(웃음)
*정지돈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에서 영화와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2013년 『문학과 사회』의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눈먼 부엉이」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과 「창백한 말」로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묻는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역사와 현재, 미래의 의미를 묻는 작업을 지속 중이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아키토피아의 실험] 도록의 에필로그 「어떤 작위의 도시」를 실었고, 낸 책으로는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문학평론집 『문학의 기쁨』(공저), 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야간 경비원의 일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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