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특집] 여자를 위해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 예술사회학자 이라영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이라영은 “내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노를 어떻게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다. 앞으로도 이 고민은 끝나지 않겠지만”이라고 귀띔했다. (2021.01.13)
“이번에 재니는 비싼 베일도 상복도 입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작업복을 입었다. 너무 슬픔에 빠져 있어서 슬픔을 표현할 옷을 입을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닐 허스턴
처음 북 도슨트로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을 떠올렸을 때만 해도, 그가 최근 펴낸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는 신간 리스트에 올라오지 않은 터였다. ‘정교한 우연’이 작동했다는 걸 직감한 건, 신간의 내용과 우리가 청하려는 주제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고전’이 꽤나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남자의 목소리로 이뤄진 기존 고전들의 면면에서 확인하게 되는 여자에 대한 무시와 몰이해, 그리고 그것들이 일상에서 끈질기게 우리의 언어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전복적 사유의 결과인 이 책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신 전했던 21인의 미국 작가와 작품을 호명하고 저자의 목소리를 더해 쓴 독서 에세이다. 호명된 미국 작가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 “이 책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조롱하거나 교묘히 지웠던 과거와의 절연 선언이다”라는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건 그 때문이다. 책을 쓴 의도에 대해 이라영은 “내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노를 어떻게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다. 앞으로도 이 고민은 끝나지 않겠지만”이라고 귀띔했다.
단편소설만이 가진 형식적 힘을 잘 활용하는 작가를 좋아해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주저 없이 꼽고, 최근 읽은 김혜순 시인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가 “서구, 남성,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모습이 읽혀 인상적”이었다는 리뷰를 전하는 이라영. 그의 도슨트 키워드는 ‘여성의 노동’이다. “제가 늘, 일관되게 말해온 주제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노동, 여성 노동자.” 그 기준을 타래 삼아 강경애, 신경숙, 김지은, 조라 닐 허스턴의 이름이 앞 선에 섰다. “굳이 순서를 정한다면, 『인간문제』, 『외딴방』, 『김지은입니다』를 읽은 후,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를 읽기를 권합니다. 그러면 시대와 장소, 인종을 넘어 여성이 경제적 주체이며 말하기의 주체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 문제』, 강경애 지음
작가가 28세이던 1934년에 연재한 소설로 식민지 조선이 배경이다. 봉건시대 신분사회에서 하층계급이 겪는 폭력부터 산업화된 도시에서 노동자로서 겪는 착취와 학대까지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인 선비와 첫째, 그들의 동료 갓난이는 사회주의 이념을 배우고 노동자의 연대를 통해 체제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인물들이 성장하고 배우며 착취에 저항하고 연대하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또다시 남은 자들의 몫은 무엇인지 외치는 민중의 목소리가 절절히 담겨 있다. 분단국가인 탓에 20세기 초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듯, 이 훌륭한 노동소설 역시 덜 알려진 면이 있어 많은 사람이 읽기를 바란다.
『외딴방』, 신경숙 지음
작중 화자는 신경숙 소설가처럼 산업체 고등학교 출신으로 작가가 된 인물이다. 이야기는 화자가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외딴방』은 노동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기보다 노동자와 작가 사이에서 ‘기억하기’와 ‘말하기’의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작가인 서술자와 과거 속에서 노동자인 ‘나’ 사이에서 이 ‘여성 노동자-작가’의 주체적 말하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 구석구석 살펴보면 흥미롭다. 주인공 외에도 글을 모르는 엄마나 사진작가가 되길 원하는 여성 인물 등 다각적인 면에서 노동 계층 여성의 주체적 말하기와 시선에 대한 욕망이 읽힌다. 『여공문학』과 함께 읽길 권한다.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지음
『김지은입니다』는 ‘논픽션’이다. 실제 노동자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고발하는 책이다. 피해 생존자의 투쟁의 기록이고 연대의 증거다. 그의 폭로와 기록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다. 많이 읽혔지만, 그래도 더 많이 읽히길 원한다. 복원해야 할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많으니까.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연구서인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도 함께 읽으며 일터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성희롱, 성추행 등이 왜 노동권 침해인지 인식했으면 한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 책은 한 여성이 세 번의 결혼을 통해 단독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뒤로 갈수록 좋은데, 특히 마지막이 가장 좋다. 평범해 보이는 한 여성이 온갖 일을 겪으며 결국에는 홀로 독립한다. “상복을 입은 정숙한 아내보다는 작업복을 입은 모습에 늘 박수를 보내요.” 한 문장으로 언급될 뿐이지만 나는 이 장면이 경제 활동의 주체로 살아갈 주인공 재니의 미래를 상징한다고 본다. 더불어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소설에서 ‘흑인 여성은 이 세상의 노새’라고 표현하듯, 흑인 남성 운동가와 지식인들의 목소리와는 결이 다른 목소리를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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