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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의 선택 일기] 쓰는 것도 만드는 것도 처음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편집자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이 직업은 개인의 선택이 결과가 되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2020.01.06)
에세이를 쓰는 건 처음이다. 책에 기대어 책 이야기를 하는 책 리뷰는 종종 써 본 적이 있는데. 어떤 것을 쓸 수 있을지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고민하다 보면 교정지를 처음 받아들고 하는 고민과 다르지 않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책을 만드는 일과 글을 시작하는 일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그리 다르지 않은 일을 할지라도 내가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크게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에세이를 만드는 것도 처음이다. 올해 하반기 동료와 함께 에세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문학 편집자가 되어 시집, 소설집, 장편소설, 비평집 등을 만들며 작가의 창작 작업과 그 주변에 대해 기록한 편안하고 아름다운 책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동시대 작가들이 각자의 문학에 대해 쓰는 소박하거나 거창하고 야심만만한 동시에 야망 따위는 하나도 모르고 순하고 다정하지만 불현듯 치사하고 뻔뻔해지기도 하는 개성 있는 이 시대의 문학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조지 오웰이, 어슐러 르 귄이 자신의 창작물과 삶에 대해 나름의 고민과 답을 내놓는 것처럼 국내 작가들의 '지금 여기 창작 일기'를 읽고 싶었다.
문학론 에세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글을 쓸 사람이다. 우리가 읽고 싶은 건 글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당연히 가장 열심히 한 일도 작가를 만나는 일이었다. 창작물을 읽고 궁금해진 작가를 만나 창작물에 대해, 창작 환경이나 일상에 대해, 작가 스스로에 대해 알려 달라고 말하는 일. 다른 어떤 원고 미팅을 할 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인드맵 같은 대화를 하고 마지막에는 항상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하곤 했다.(“편하게 써 주세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쓰는 사람의 주저와 결심에 대해 생각했다.
편집해야 하는 에세이 시리즈를 생각하다가 에세이를 써 보기로 결정했다. 직접 써 보면 에세이 쓰기와 에세이 편집을 (그 어려움과 즐거움 모두)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 형식의 문학론 에세이를 만들게 된 편집자로서 나의 에세이도 그런 식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날짜를 붙여서도 써 본다.
2020/11/26
<던전>에 가입했다. <던전>은 넷플릭스처럼 결제를 해 두면 연재되는 글들을 모두 읽을 수 있는 문학 플랫폼이다. 시와 단편소설, 에세이 등이 연재되고 있다. 웹 지면에서 좋은 글을 보면 꼭 종이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제 곧 그 글을 가질 수 있구나 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처음 결제를 하고 읽은 것은 역시 에세이였다. 강보원 평론가의 「영화 이야기는 아닌」을 읽었고 이게 왜 우리 원고가 아니야 하고 조용히 질투했다. 그 글이 수록된 책이 곧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 그 글을 가질 수 있구나 하고 조용히 기뻐했다.
2020/11/28
오랜만에 집에 가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 두 권을 가져왔다.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 『방랑기』와 미셸 투르니에 산문집 『외면일기』다. 일기 같은 소설과 진짜 일기의 차이를 우리는 가를 수 있을까? 소설은 결국 허구이며 일기에도 얼마간의 거짓이 함유되어 있다. 그것이 진짜이므로 가깝게 느껴진다거나 허구이기 때문에 멀게 느껴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만연하지만…… 두 책을 읽다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1930년에 쓰인 일본 작가의 소설 속에서 동시대의 목소리처럼 생생한 쓰기와 삶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고 1924년생 프랑스 작가의 산문에서 내가 오래도록 고민하고 곤란해하던 부분의 힌트를 마주할 때. 거리감은 마음대로 조절된다. 쓰여진 것은 쓰여진 것. 중요한 것은 읽는 이의 마음이 가서 붙는 일이다. 두 부분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10월 X일)
단고자카의 도모야 시즈에 씨 하숙에 간다. 『두 사람』이라는 동인 잡지를 낼 이야기를 한다. 돈 10엔도 마련할 수 없는 나로서는, 잡지를 내는 것이 불안하지만, 도모야 씨가 어떻게 해 줄 게 틀림없다. 윤택하게 사는 사람의 생활은 이상하게도 어림잡을 수가 없다.
(……)
쓰고 싶다. 다만 그뿐, 몸을 바쳐 쓰는 것이다. 서양의 뻐기는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뻐기는 것은 금물이다. 먹고 싶을 때는 먹고 싶다고 쓰고, 반했을 때는 반했어요라고 쓴다.
-하야시 후미코, 『방랑기』, 78~79쪽
문학 분야에 있어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책의 탁월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반대로 아마추어는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즉시 그 책의 분명한 장점들에 대해서도 아예 장님이 되어버린다.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74쪽
편집자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이 직업은 개인의 선택이 결과가 되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자주 선택해야 하고 열심히 선택해야 한다. 편집자로서 '잘' 선택하는 일은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에세이를 쓰며 가장 중요한 일 역시,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을 쓸지, 어디까지 쓸지, 어떤 문장으로 쓸지, 무엇을 위해 쓸지 전부 나의 선택이다. 날짜를 붙여 쓴 두 일기에서 내가 첫 문장에 쓴 모든 동사를 "선택했다"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이 연재 에세이의 제목은 <선택 일기>다.
내가 쓰는 말과 글을 통해 내가 개인의 선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재차 확인하는 나날이다. 유튜브 촬영 중에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별것도 아닌 일로 혼자서) 놀라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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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한국문학 편집자
<미셸 투르니에> 저/<김화영> 역15,120원(10% + 5%)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여행을 하는 동안 여정과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 따라 변하는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기록한 에세이다. 꾸준히, 그리고 틈틈히 일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일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