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탄생] 깜깜해진 세상에서 더 빛나는 책
박노해 『푸른 빛의 소녀가』
저 먼 행성에서 불시착한 푸른 빛의 소녀와 지구별 시인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은 책인 만큼, 표지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2021.01.04)
박노해 시인의 첫 번째 ‘시 그림책’이라는 부제를 보고 “믿고 구입”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표지의 푸른빛만으로도 책을 집어들었다는 반응도 많은데 펼쳐보기도 전에 나오는 반응인 걸 보면 분명 색감과 제목, 타이포그래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이 있는 것 같다. 2020년 ‘코로나 블루’ 속 창백하게 웅크린 사람들의 가슴에 본연의 푸른빛이 지닌 순수, 신비, 희망을 일깨우는 시인의 뜻이 전해진 것일까.
저 먼 행성에서 불시착한 푸른 빛의 소녀와 지구별 시인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은 책인 만큼, 표지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디자이너라면 공감하겠지만 블루는 구현하기 가장 어려운 색 중 하나이다. 깊으면서도 맑고 시린 블루. 그 색감을 내기 위해 먼저 딱 맞는 잉크가 필요했다. 기성품으로는 도저히 구현이 어려웠다. 수소문 끝에 안료를 공수하고 조합해 특수잉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찾아간 인쇄소. 견본이 될 만한 팬톤칩조차 없어, 기장님과 ‘감’으로 색을 맞춰가며 잉크를 조금씩 첨가해 조색했다. 인쇄기에서 갓 나온 하얀 종이에 빛나는 블루를 보는 순간, 마침내 우주의 도움(!)이 조금 더해져 원하던 푸른빛을 만났다. 인쇄소 창밖으로 짙푸른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 책은 글이 쓰여지고 그에 맞춰 그림을 그렸거나, 그림에 맞춰 글을 써서 만든 책이 아니다. 박노해 시인은 「푸른 빛의 소녀가」 시를 쓴 후, 우주적 상상력과 철학적 메시지가 통하는 말레비치 작품과 ‘불꽃의 만남’을 하게 된다. “말레비치, 그는 캔버스의 시인이다”라는 박노해 시인이 선정한 29점의 그림에는 대지와 전통의 전승이, 시대의 고뇌와 저항이, 노동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흐른다. 무엇보다 말레비치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우주를 그려낸 여러 작품을 남겼다.
디자인 작업을 하는 내내 놀랐던 점은 두 작가의 완벽한 조화였다. 마치 대화를 나누듯 박노해 시인의 시에 말레비치가 그림으로 화답하는 것 같았다. 이 어우러짐을 책에 한 장 한 장 구현하는 과정은 실험의 연속이었다. 캔버스의 질감이 느껴지는 인쇄, 종이의 선택. 책은 머리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읽는 것이기에. 그래야만 가슴을 관통하는 것이기에.
본문으로 고른 종이는 펼침책을 만드는 데 가능한 최대 두께였다. 인쇄 후 접지 과정을 거치는데 보통은 16페이지, 최소 8페이지 접지를 한다. 이 책은 4쪽 접지만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종이가 터지거나 밀리면서 펼침면 그림이 어긋나버리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견고함을 위해 실로 제본한 뒤 풀칠도 3차례 더했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은 귀신같이 안다. “예뻐요, 너무 예뻐요. 책이 이런 건지 몰랐어요. 자꾸 보고 싶어서 열 번을 봤어요.”(9살 소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이 마치 갤러리를 거니는 것 같네요.”(40대 엄마)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그 푸른빛에 나를 흠뻑 담가야지.”(30대 여성)
어느 해보다도 무겁고 숨죽인 분위기 속의 연말, 지금 손에서 손으로 이 책이 전해지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마운 친구에게, 소중한 연인에게 혹은 웅크린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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