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연년세세’라는 말이 제목인 책을 한 권 갖고 싶어서 (G. 황정은 작가)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166회) 『연년세세』
지금 제 옆에 가급적 오래 글을 쓰다가, 너무 무감해지고 부주의해지면 미련 없이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연작소설 『연년세세』를 펴낸 ‘우리의 작가’ 황정은 작가님 나오셨습니다. (2020.12.17)
그 두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황정은 작가님의 연작소설 『연년세세』의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인생의 비결’ 그것은 어떤 걸까요? 사람들은 으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잊어버리고 살아라’ 같은 말을 하는데요. 과연 그것이 인생의 비결일까요? 인생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뭉개고, 외면하게 하는 말은 아닐까요? 그것이 정말로 비결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이 많아집니다. 황정은 작가님의 소설 『연년세세』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묻습니다. 그 거대한 질문 앞에서 어쩐지 아득해지기도 하고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드디어 소설가 황정은 작가님을 모시고 『연년세세』에 대한 질문과 황정은의 소설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눠보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오은: 섭외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금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오은의 옹기종기> 섭외를 담당하시는 프랑소와 엄님이 작가님들을 섭외할 때, 거절을 받으면 두 번 이상 요청드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거든요. 거절의 이유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황정은 작가님은 꼭 나와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작가님께 직접 요청을 드렸다고 해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으시고 승낙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혹시 출연을 망설이진 않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황정은: 출판사를 통해서 출연 제의를 전달 받았는데요. 책이 막 출간된 당시에 제가 이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많지 않고,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사양을 했어요. 그런데 이후에 직접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생각을 해보니 제가 사람 만난 지가 너무 오래 돼서(웃음) 이렇게라도 약속을 만들어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오은: 책 출간을 하면 독자 분들과 만나는 자리도 종종 있는데 올해는 그렇지 못했잖아요. 작가님은 올해를 어떻게 기억하시게 될지 궁금했어요.
황정은: 저는 출근을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 일 년 내내 집에 있었는데요. 창으로 경의중앙선이 보여요. 내내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고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고, 달라질 것 같은데요. 조짐은 전부터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어느 순간 이런 시기가 도래할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 문장 있잖아요. “그날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이런 문장을 자꾸 생각하게 만든 해였던 것 같아요.
오은: 이제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소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언제나 바라는 사람. 늘 구석에 혼자 있는 어린이였다. 한글을 일찍 깨친 편인데 사촌에게서 물려받은 두꺼운 하드커버에, 세로 문장이 적힌 낡은 책들을 의미도 모른 채 많이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라스콜리니꼬프, 네흘류도프 같은 이름들의 소리가 재미있었다. 중학교 때, 집이 있던 방화동에서 삼선 슬리퍼를 끌고 버스를 타고 놀러 다녔던 곳은 세운상가. 대학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었는데 이후 세운상가에서 오디오 수리를 하는 아버지 곁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때의 경험은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와 「웃는 남자」 등에 담겨 있다.
20대 중반, 많이 아팠다. 몸무게가 40kg 나가던 시절이었다. 뭔가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는데, 몸으로 하는 것은 일찍이 포기했고 읽고 쓰는 것은 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쓰고 보니 쓰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뭔가가 생각날 때마다 쓰느라 여기저기 많이 부딪혔던 기억이 있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마더」라는 단편으로 등단했고, 「마더」는 황정은이 마지막 문장까지 써 본 세 번째 소설이었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소설이 된다. 꿈을 메모하곤 하는데 가끔은 꿈의 이야기가 소설에 담기기도 한다. 이상적인 하루 작업량은 9.3매에서 9.5매. 문제는 이튿날 절반이 날아간다는 사실이다. 마감이 있을 때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10시까지 쓰고, 운동을 하고, 12시가 되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1시에 청소를 하고, 1시간 낮잠을 자고, 이후 8시까지 다시 원고를 쓰는 생활을 한다. 책 냄새, 종이의 질감을 좋아한다. 특히 좋아하는 물성을 가진 책은 『영원의 건축』. 한 권으로는 부족해서 여러 권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달팽이 안단테』 이다. 좋아하는 책은 소리 내서 읽는 습관이 있다.
복숭아를 굉장히 좋아한다. 물복보다는 역시 딱복파다. 깔끔하고 가느다란 선으로 그린 그림을 좋아하는 황정은. 욕을 잘하는 황정은. 웨이브 춤을 좀 추는 황정은. 집에 있을 때는 종종 춤을 추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고, 이들이 퇴근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같이 먹는 것이 가장 좋다.”
황정은: 세상에, 맙소사.(웃음)
오은: 어릴 때부터 『죄와 벌』, 『부활』 같은 러시아소설을 읽으셨던 거예요? 어릴 때 읽기는 조금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 책들을 읽은 순간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황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밖에서 친구들이 놀자고 부르는 소리, 거기다가 “안 놀아”라고 소리지르고 혼자 책을 펼쳐 들고 있던 것. 책이 세로쓰기로 되어 있었고요. 종이 질감, 냄새, 하드커버 표지의 질감 다 기억이 나요. 내용은 사실 모르죠. 그런데 글자를 읽는 게 너무 좋았어요. 특히 러시아소설은 인물의 이름이 대부분 신기한 조합으로 자음과 모음이 연결되잖아요. 그래서 자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오은: 이제 본격적으로 『연년세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저희가 작가님께 직접 책 소개를 부탁드리고 있어요.
황정은: 어려운 임무를 주시는군요.(웃음) 소개를 하려면 뭔가를 요약해서 말씀 드려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특히 『연년세세』는 그런데요. 한영진, 이순일, 한세진, 하미영의 이야기. 그냥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오은: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라고 쓰셨는데요. 가족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원래 다른 의도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던 건가요? 아니면 그저 독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쓴 문장이었나요?
황정은: 후자 쪽이었어요. 분명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쓰는 동안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서사로 지칭할 것 같은데 저는 희한할 정도로 이것이 가족 이야기로 안 느껴지는 거예요. 관계에 따른 호칭으로 말하자면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어머니, 이런 식으로 호명할 수 있는 관계들인데도 말이에요. 제가 일부러 그 관계 호명을 피하면서 작업을 해서 그런지 가족 이야기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썼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지.
오은: 저는 이것을 용서 서사로 읽었어요. 이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서 출발한 소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재독할 때 하게 되더라고요.
황정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여기 실린 소설들을 쓸 때 제가 많이 생각한 단어이기도 했고요. 다만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 중심을 둔 것은 아니었고요. 용서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용서하라는 말 자체가 각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은: ‘연년세세’의 의미가 ‘여러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짐’이에요. 그런데 이 단어보다 먼저 떠오른 게 ‘대대손손’이었다고 해요. 대대손손이 아니라 연년세세가 제목이 된 이유가 있을까요?
황정은: 사실 대대손손은 애초에 제목으로 생각한 적은 없고요. 『디디의 우산』의 두 번째 중편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대대손손을 연상시키는 어떤 말이, 약간의 박자를 지닌 채로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요. ‘5대 독자(짝), 3대 장손(짝)’, 제가 대학교 때 들은 말이기도 한데요. 『디디의 우산』 원고를 출판사에 다 보내고 이상하게 그 박자와 대대손손이라는 말이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닌데도요.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했지만 ‘이 말 정말 좋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그 와중에 한국의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는 가족 구성원 서사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연년세세라는 말이 생각났는데 그 말이 생각나서 정말 좋았어요. 수평적인 흐름이라고 해서 좀 더 공평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대대손손보다는 압박감이 좀 덜하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 말이 제목인 책을 한 권 갖고 싶어서 「파묘」를 바로 쓰기 시작했어요.
오은: 말씀하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디디의 우산』에 함께 실린 작품 「d」와 연결되어 있고요. 「d」는 『파씨의 입문』에 수록된 단편 「디디의 우산」을 ‘부숴 만든’ 것이에요. 이렇게 작품과 작품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작업이 계속되는 이유가 궁금했어요.
황정은: 제가 소설을 작업하는 방식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요. 어떤 시기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게 소설이 되거든요. 소재를 찾는 게 아니라 뭔가를 계속 생각하게 되고, 뭔가가 또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소설이 되고요. 소설이 끝나도 그 이야기들이 그 소설 한 편에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계속 생각이 이어지더라고요. 이를 테면 연년세세식으로요. 앞선 어떤 덩어리와 공통되는 어떤 점이 있는 어느 덩어리가 또 연결이 되고, 또 연결이 되고 그래요.
오은: 『연년세세』는 연작소설이에요. 장편소설과는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사실 연작소설에 드는 품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황정은: 연작소설과 장편소설을 구분해서 말할 수 있을 만큼 제가 장편이나 연작 작업을 많이 한 편은 아니라 뭐가 다른지를 잘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다만 이번에 『연년세세』를 작업할 때는 고통의 강도가 다른 책들에 비해 셌어요. 여러 의미로요. 『연년세세』의 경우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바람을 갖고 있는 몇 사람의 내면을 차례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어서요. 상당히 고통이 있었고, 집필 기간이 길었어요. 일단 고통을 견디면서 원고 앞에 앉기까지가 너무 힘들었고요. 원고 앞에서 매 문장을 쓰면서 느끼는 마찰감, 내가 정말 얼굴을 바닥에 갈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마음 어딘가가 계속 거친 단면에 긁히는 것 같은 느낌을 쓰는 내내 느껴서 힘들었습니다.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먼저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황정은: 꼭 한 권만 해야 되나요?(웃음) 우선, 올해 읽은 한국문학 중 이주혜 작가의 『자두』라는 책을 추천해요.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 문장을 읽는 재미로, 흡족한 독서를 경험하게 만들었던 책이에요. 많이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한 권을 더 말씀 드리면 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일 년에 한두 번 하던 육식을 완전히 안 하게 됐어요. 정말 잘 쓴 소설이라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오은: 두 번째 질문, 『연년세세』가 한 권 있다면 누구에게 선물하고 싶으세요?
황정은: 저는, 그냥, 없애버릴 것 같습니다.(웃음) 한 권만 남았다면 읽을 만한 사람은 다 읽었다는 의미 아닐까 해서요. 마지막 남은 한 권을 누군가의 품에 안기느니 그냥 불태워버리겠다(웃음)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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