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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칼럼] 왁스 재킷을 샀다 – 마지막 회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2월호
번역가는 원래 외출이 뜸하다. 한 프로젝트의 일정을 일주일로 잡는다 치면 보통 그 일주일은 온전히 작업 시간만을 계산한 일수다. (2020.12.04)
외출할 일이 적다 보니 옷을 사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저 입던 옷을 몇 년이고 못 입게 될 때까지 입는다. 그나마 결혼한 후로는 쉰내 풍기던 자취방 총각 꼴을 할 수 없어 외투 정도는 멀끔하게 입으려 노력한다.
올가을엔 몇 년 만에 재킷을 한 벌 샀다. 봄, 가을에 입기 좋은 두께에 짙은 세이지 색, 장식은 하나도 없지만 주머니가 많아 나처럼 칠칠치 못한 사람에게 좋다. 얼핏 보기에는 수수한 아저씨 재킷 같아서 유행도 타지 않을 테고 관리만 잘하면 10년 넘게 입을 수 있겠다. 게다가 동네 마실 나갈 때 걸쳐도, 외출할 때 걸쳐도 무리 없는 무난한 스타일. 나 같은 사람에겐 이상적인 조건의 재킷이다. 단, 왁스 재킷이라 초반엔 불편하다는 후기가 많았다.
“닿는 곳마다 왁스가 묻어서 찜찜하고 불편함.”
2주 정도 바람 잘 드는 곳에서 말리면 입을 만하다는 후기를 보고도 망설였다. 가을이라 해야 한 달이면 지나는데 2주나 못 입는다고? 2주나 못 입는 옷을 사서 걸어놓을 필요가 있나?
옷 하나로 고민하는 것조차 번거로워 구매 버튼을 눌러버렸다. 며칠 후 받아 든 왁스 재킷은 비닐 포장에 들어 있었고 꺼내면서부터 손에 왁스가 묻어 축축했다. 왁스를 바른 건지 왁스에 담근 건지 도저히 그대로 입을 순 없었다. 나는 투덜대며 인터넷 후기에서 본 대로 바람 잘 드는 베란다에 재킷을 걸었다.
무슨 옷 하나 입는 데 2주를 기다리래. 2주면 얼마나 긴 시간인데.
긴 시간...?
걸어둔 재킷이 머릿속에서 잊힐 때쯤 3주가 지났다.
3주 동안 외출할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매일 딸과 산책을 나가지만 놀이터에서 아이를 수십 번 들어 올리고 내리고 하는데 왁스 묻은 옷을 입을 순 없으니까. 결국 베란다 2주 형을 선고받은 왁스 재킷은 기약 없이 4주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은둔형 외톨이나 다름없는 번역가가 2주 외출 못 할 걸 걱정했다니 주제를 망각하셨다. 요새는 그나마 한 달에 두어 번 있던 GV(Guest Visit,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도 코로나 시국이라 없다시피 해서 나갈 일이 더더욱 없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번역가는 원래 외출이 뜸하다. 한 프로젝트의 일정을 일주일로 잡을 때,보통 그 일주일은 온전히 작업 시간만 계산한 일수다. 팔자 좋게 “사적인 일정이 생길지 모르니 하루 정도 더 넣자” 하고 정한 일주일이 아니다. 그러니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하루 외부 일정을 보고 오면 일이 밀리고 그다음, 다다음 프로젝트까지 고생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과거의 나를 소환해 서른마흔다섯 대쯤 뺨을 갈겨야 한다.
각 프로젝트 사이에 쉬는 날을 하루 이틀 넣는 것도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가의 일정은 번역가의 사정이 아니라 대개 클라이언트의 사정에 따라 정해진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자신들이 원하는 시기와 기간에 맞춰 작업해 줄 번역가다. 세워둔 일정에 차질을 빚더라도, 심지어 개봉 시기를 조율해서라도 반드시 특정 번역가를 써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모를까 번역가의 편의에 맞춰 일정을 짜기는 어렵다.
물론 내 편의대로 일정을 짜고 급하게 의뢰하는 일을 거절해도 상관없다. 백수가 될 각오만 한다면 뭔들 못 할까. 불쑥 나오라는 친구의 전화에 번역가들이 반색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한참 전에 정해놓은 약속이 아니면 나가기가 어려워 늘 바쁜 척한다는 핀잔을 듣는다. 번역가가 가족에게 혹은 친구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쁜 척한다"다. 지금이야 경력이 14년이나 됐으니 가족도 친구도 내 일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그전에는 별의별 억울한 오해와 트러블이 다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는 거의 절반의 절반 정도로 추려졌다.
오래전 알고 지내던 번역가 누나가 있다. 그도 번역가답게 외출이 뜸했다. 그런데도 구두를 참 좋아했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구두를 사놓고도 신을 일이 없다고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은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았노라고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말했다.
“책상 아래 신문지를 깔고 새 구두를 신고서 작업하면 돼.”
그러면 종일 새 구두를 신을 수 있다며 킥킥댔다. 나는 어이가 없어 집구석에만 박혀 있다 보니 실성한 거 아니냐고 했다가 꿀밤을 대차게 맞았다. 아니, 아무리 못 나가서 답답하다 해도 인간적으로 그렇게까지 해야 돼?
나는 오늘 왁스 재킷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벗었다.
이놈의 왁스가 등받이며 팔걸이며 안 묻는 곳이 없다.
그때 웃어서 미안해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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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