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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이정은 주연 <내가 죽던 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한다
여성의 삶으로부터 미래로
현수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 여성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게 당연한 풍토에서 잘못된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죄를 물었고 주변의 책임까지 떠안았다. (2020.11.05)
‘내가 죽던 날’이다. ‘죽은’이 아니다. 죽음의 과거형이다. 그럼 지금 극 중 ‘나’의 존재는 유령이란 얘기? 그건 아니다. 그럼 과거에 죽었는데 어떻게 지금은 살아있을 수 있나. <내가 죽던 날>은 그 사연을 다룬다. 태풍이 심하게 치는 어느 외딴 섬의 절벽에서 소녀가 떨어졌다. 자살이 유력하다. 시신이 바다에 떠내려가 찾을 수 없어 실종 상태다. 사건을 종결할 수 없다. 경사 김현수(김혜수)가 복직을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섬을 찾는다.
섬마을 주민들의 증언도 듣고, 사건 현장도 둘러봤고, 딱히 자살이 아닌 증거를 확보하기 힘들다. 종결해도 문제가 없지만, 현수는 이 소녀, 세진(노정의)에게 끌린다. 세진은 아빠의 밀수와 관련해 주요 증인으로 보호받던 중 일이 생겼다. 현수는 삶의 절벽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세진에게 이입한다. 현수는 외도한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이다. 그 여파로 팔이 마비되어 교통사고까지 일으켰다. 그 때문에 오랜 공백을 갖다가 겨우 복직의 기회를 잡았다.
현수가 세진의 사건과 관련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 중 하나는 사라진 ‘거울’이다. 이 거울은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전(前) 보호 감찰관이 섬에 들어오면서 세진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에서 현수는 둘 사이에 증인과 보호 감찰관의 관계를 넘어서는 감정이 오가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세진의 마지막을 목격했다는 순천댁(이정은)에게 관련한 진술을 듣다가 현수는 세진이 홀로 감당해야 했을 아픔에 깊이 공감한다.
거울은 반사 이미지다. 경찰 에이스로 활약하며 승진을 눈앞에 뒀던 현수는 자기 인생이 괜찮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외도 사실을 숨겼다. 이 때문에 경찰 내에서는 뒷말이 오갔다. 현수는 다른 거 신경 안 쓰려 무리하게 일에 매진했다가 오점을 남겼다. 자부심이 곤두박질하여 산산이 조각났다. 깨진 거울에 비춰볼 자신이 더는 없다. 일그러진 자신과 대면할까 봐 용기가 나지 않는다.
대신 현수는 섬에 있는 동안 CCTV에 촬영된 세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응시한다. 컴퓨터 화면에 얼굴을 맞대고 들여다보는 모습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는 듯하다. 섬에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서울에서 집중해야 하는 이혼소송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담당 변호사는 현수에게 이혼 소송과 같은 진흙탕 싸움에서는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유리하다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승소해도 큰 상처만 받는다고 조언한다.
현수가 좀체 마음을 잡지 못하는 건 개박살난 삶의 원인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거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서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가 싫고 자신 또한 소송이 본격화되면 책잡힐 것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그래서 피하는 중이었다. 세진의 사건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그것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에서 벌어진 건 현수의 심리를 반영한 설정이다.
현수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 여성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게 당연한 풍토에서 잘못된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죄를 물었고 주변의 책임까지 떠안았다. 그러다 보니 피해 의식이 생겼다. 그걸 버리고 싸울 준비를 해야만 자신을 직시할 수 있다. 세진이 섬에서 사라진 날 남기고 간 편지에는 자신의 죄도 아니면서 아빠를 대신해 용서를 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다시 말해, 현수와 세진은 서로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이다. 모든 게 없던 일이 되기를 바라는 현수와 세진은 이제 싸울 준비를 하고 피해 의식이 지배하는 과거와, 자신과 맞선다.
현수와 세진뿐 아니라 순천댁도 그렇고, 이 영화의 모든 여성을 위기에 빠뜨린 건 아빠와 오빠와 남편 등 남성들이다. 남성의 죗값을 대신하여 치르고 속죄하는 여성이 이의 기득권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고 투쟁하는 이야기다. 여성의 삶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 섬에 있을 적 세진은 순천댁에게 자신에게는 아무도 없다며 답답한 마음을 호소했다. 순천댁은 아니라고, 너만 남았어, 라고 힘을 북돋웠다. 제목의 ‘내가 죽던 날’은 여성의 삶으로서 나와 너, 우리가 다시 태어나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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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