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기득권과의 전쟁: 연대의 전성시대

묵묵히 ‘파이팅’하는 사람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것은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파이팅’의 정서 때문이다. (2020.10.15)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


제목은 사실상 ‘페이크’, 일종의 속임수에 가깝다. 영화 용어로 치자면, ‘맥거핀 macguffin’이다. 맥거핀은 주제와 크게 관련은 없으면서도 관심을 집중시키는 대상이나 상황 등으로 관객을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장치를 말한다. 제목으로 흥미를 돋우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직급 낮은 ‘미생’들이 회사에서 승진하거나 연봉 인상을 위해 좋은 점수를 받겠다고 영어 토익에 죽자 살자 매달리면서 벌어지는 코믹한 소동극을 예상하게 한다. 아니다, 제목은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한 미끼 역할일 뿐 영화가 전하는 내용은 예상 밖이다. 

자영(고아성)과 유나(이솜)와 보람(박혜수)은 입사 동기다. 벌써 삼진 그룹 근무 8년 차다. 그 정도 연차면 최소 대리 직급은 달았어야 한다. 여자인 게 뭔 죄라고! 커피 타기, 서류 복사하기, 사무실 책상 정리하기 등과 같은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다. 기회가 생겼다.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 승진이 가능하다는 회사 공고가 붙었다. ‘아이 캔 두 잇!’ 자영의 목소리 우렁차고 의지 충만한데 ‘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 더듬거리는 말본새가 이번에도 승진은 글러 먹은 듯하다. 

자영은 하릴없이 서류를 전달하러 간 자회사 공장에서 무단 폐수 방출의 현장을 목격한다. 불법에 눈 감자니 양심에 찔리고, 내부 고발했다가는 직장 잃을 거 뻔하고, 고민하던 차 오염된 물을 마시고 이상이 생긴 마을 주민들의 사연을 듣게 된다. 그래 결심했어! 자영은 해고 위험을 무릅쓰고 유나와 보람을 설득해 불법 폐수 방류와 관련한 증거 확보에 나선다. 수학 천재 보람은 회계상 회사가 의도적으로 잘못 기재한 숫자를 포착하고, 추리소설 마니아 유나는 용의자 뒤를 쫓아 비리의 윤곽을 잡는다. 이에 자영은 두 친구와 합심해 “위 캔 두 잇!” 회사와 맞짱을 뜬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두 개의 실제 배경을 모티프로 출발한다. 모 대기업에서 개설한 상고 출신 고졸 사원들을 위한 토익 반과 폐수 유출 사건이 그것이다. 전자의 배경으로 밀어붙이면 코믹과 감동의 드라마로 빠질 수 있는 주제가 폐수 유출 사건을 더하니 무게감이 생기고, 후자의 사회 비판 메시지만 강조하면 관객의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배경이 기업 내 토익 반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결합하니 예상치 못한 재미가 발생한다. 진지한 메시지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구성한 전개가 바로 이 영화의 백미다. 

연출을 맡은 이종필 감독은 두 개의 실제 배경을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로 ‘파이팅’을 주목했다. “핵심은 ‘파이팅’에 있었다. 삶의 태도로써 묵묵한 파이팅.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관하여 포기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싶지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비록 나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우리는 위대하니까.” 1995년을 배경으로 하면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것은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파이팅’의 정서 때문이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포스터


삼진 그룹의 상고 출신 여자 직원들이 일렬횡대로 전진하는 이 영화의 B컷 포스터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를 생각나게 한다. 자영과 유나와 보람이 전쟁(?)하는 대상은 내부 비리이면서 이를 주동하고 모의하고 기득권의 단물만 쪽쪽 빼먹으려는 윗선의 남자들이다. ‘남자 vs 여자’의 구도인 것 같아도 ‘위대한 우리’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단순한 이분법 대신 성별과 무관하게 직급은 낮더라도 주어진 일과 사명을 묵묵하게 해나가는 사람들의 연대를 조명한다. 다시 패러디하자면, ‘기득권과의 전쟁: 연대의 전성시대’라고 할까. 

세상의 변화는 웬만해서는 혼자 힘으로 힘든 까닭에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이와 같은 패턴이 중요하다. 선한 의도 또는 묵직한 메시지와 상관없이 이목을 끌어야 한다. 거대 권력에 지친 2020년의 대중은 여성(의 삶), 1990년대, 소수자, 공정 등의 키워드와 관련한 이슈에 관심이 많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이의 트렌드를 간파하여 ‘힙’한 이야기 전개로 심각할 수 있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설득한다. 관객이 대중영화에 바라는 대부분이 담긴 작품이라는 얘기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예매하러 가기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기사와 관련된 영화

오늘의 책

확장하는 김초엽의 세계

김초엽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다르다는 이유로 ‘소수자’가 된 이들, 안주하는 대신 변화를 꿈꾸며 탈피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중심에 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고의 경계를 허물고 상상과 이해의 영역을 넓히며, 다시 또 한걸음 서로의 우주에 가까워진다.

진정한 친구에게 외치는 사랑스러운 주문

어린이의 마음을 경쾌한 상상으로 해소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최민지 작가의 신작. 아이들의 시선에서 서로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과 눈부신 우정을 사랑스럽게 담아냈다. 또한 우정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해가 깊어지는지 다정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전한다.

읽다보면 공부 제대로 하고 싶어지는 책

『나는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로 9개월 만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공부법을 소개한 이윤규 변호사의 이번 신간은 자신에게 맞는 공부법을 찾아가는 책이다. 그 시작은 “이미 이루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후 소개된 과정도 공부의 길에서 헤매고 있을 수험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기본을 지키는 손웅정의 삶의 철학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이자 축구 지도자로서, 그리고 그 자신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담은 손웅정 감독의 에세이. “축구와 가족, 책만 있으면 되는 사람” 손웅정의 책은 어떨까.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했던 그의 축구 철학, 교육 철학, 삶의 철학을 모두 꺼냈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