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제대로 이기는 사람들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1월호 『5번 레인』, 『별빛전사 소은하』
두 편의 동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일은 ‘제대로 이기는 일’의 의미다. 경쟁은 어른들에 의해서 주입된 과제로 여기고 어린이는 경쟁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한 동화가 택하는 길이 아니다.(2020.11.03)
좋은 문학작품 안에는 이야기의 좁은 구간과 넓은 구간이 있다. 독자는 좁은 구간에서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며 감정을 이입하고 넓은 구간에서는 인물이 놓인 자리와 인물이 나아가는 방향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에는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과 세계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겠는데 책을 펼치고 이야기의 좁은 구간을 등장인물과 함께 달리면서 독자인 우리는 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섬세하고 다층적인가를 깨닫는다. 그러다가 서사의 넓은 구간에 들어서면 비로소 그 인물을 포함한 나와 세계가 보인다. 갇혀 있던 인식의 렌즈가 뒤로 물러나면서 드론의 시점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확장의 경험을 한다. 나도 너도 이 넓은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는 순간, 세계는 책을 읽기 전과 다르게 보인다.
일반문학작품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아동문학작품 읽기만의 매력 중에는 좁은 구간과 넓은 구간의 갭이 크다는 것이 있다. 아동문학작품의 1차적 독자는 어린이이지만 어른이면서 아동문학작품을 읽게 되었을 때 느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가 있다면 바로 이 갭을 느끼면서 읽는 즐거움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어른이 된 우리는 마냥 좁거나 마냥 넓기만 한 뭉툭한 편향을 갖게 될 때가 많다. 좁은 구간과 넓은 구간을 빠르게 오가면서 전환의 스위치를 누를 기운도 없고, 무엇보다 적당히 좁게, 대충 넓게 살면 그것이 편하기 때문인데 이를 다른 말로는 ‘안주’라고 부른다. 좋은 아동문학작품은 나약한 안주의 유혹과 맞서 싸운다.
동화는 좁은 구간은 더 좁게 넓은 구간은 더 넓게 다루는 장르다. 등장인물과 1차 독자가 무한한 동력과 잠재력을 지닌 어린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그 좁고 넓음의 거대한 갭이야말로 성장이 지니는 변증적 성격이기 때문이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동화에는 고유의 에너지가 있고 작품을 읽고 나면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성장은 좁았다가 넓었다가 다시 좁은 곳으로 들어가고, 멈췄다가 되돌아갔다가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를 반복하는 지독할 정도로 고단한 과정이다. 이걸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어린이다. 어른들에게도 아동문학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이만큼 갭이 큰 작품을 일반문학에서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개는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주파수 대역을 제한한다.
아동문학은 자라나는 아동이 그 갭의 당사자, 폭과 깊이의 증인이기 때문에 더 좁고 더 넓게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 동화읽기의 즐거움이 있다.
『5번 레인』은 중학교 진학을 앞둔 강나루라는 한 어린이의 좁고 좁은 성장의 구간을 따라가는 동화다. 강나루는 한강초등학교 수영반, 재능 있는 선수다. 수영대회에 나가면 5번 레인에 선다. 보통 4번 레인은 예선 1위가, 5번 레인은 2위가 서는 자리다. 대부분 4번 레인을 차지하는 푸른초등학교의 김초희는 강나루가 갖지 못한 긴 팔과 집중력을 가졌다. 걷기만큼이나 헤엄치기를 일찍 배웠고 수영을 좋아해서 자고 일어나면 물을 가르며 자란 강나루에게는 수영장의 레인이 아닌 다른 곳에 선 자신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일직선으로 헤엄칠 수 있는 그 좁은 5번 레인에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 같다는 좌절감, 담담해지려해도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4번 레인의 움직임, 반드시 제대로 이기고 싶다는 굳은 의지의 경합을 읽는다. 강나루는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더 알고 싶고 알기 위해서 김초희를 이기고 싶다.
그런 강나루 곁에 문화센터에서 수영을 배운 아마추어 접영 선수 정태양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더 좁은 곳으로 파고 들어간다. 낯선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4번 레인의 물결을 감지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경기에서 김초희를 제대로 이기고 싶었던 강나루는 그 ‘제대로’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정태양의 도움을 받고 좁은 구간의 레인을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른다. 물에서 숨을 쉬는 일이 땅보다 편한 두 어린이가 이루어내는 물 흐르는 것 같은 평온한 사랑은 레인의 역주와 대조를 이루면서 이 작품의 넓고 아름다운 구간이자 무장해제 된 고백의 장소인, 학교 수영장 장면에 이른다. 이 작품은 몇 가지 면에서 매우 집요하다. 강나루와 김초희는 ‘제대로 이기는 일’을 위해서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며 끝까지 대결한다. 정태양은 흔한 사랑의 요정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작가는 레인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레인 안에서 마무리하면서 한 사람이 자라난다는 것의 뚜렷한 의미를 깊게 탐색한다.
『우주로 가는 계단』을 썼던 전수경의 신작 『별빛전사 소은하』는 넓고 스케일이 큰 서사다. 학교에서는 외계인이라고 따돌림 받지만 게임의 세계에서는 골드레벨인 게이머 소은하는 자신과 가족들이 모두 외계에서 온 헥시나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경락마사지를 하는 엄마는 소은하의 롤모델이자 헥시나인들의 대장이며 PC방을 운영하는 아빠는 소은하와 엄마의 믿음직한 조력자다.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하려는 유니콘마스크에 맞서 게임 아이디 ‘별빛 전사’인 소은하와 그가 이끄는 어린이 게이머들이 벌이는 작전은 대범하고 치밀하다. 어린이들은 ‘외계인이나 지구인이나’라는 배포로 세계를 내려다본다. 게임과 현실이 연결된 세계에서 어린이의 육체와 경험이 지니는 한계는 무너지고 유니콘마스크와 별빛 전사의 대결은 일말의 양보 없이 대등하게 이루어진다. 소은하는 이 대결 과정에서 우주의 시야에서 자신의 할 일을 바라보게 되고 과업을 찾아낸다. 어린이가 어른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경험, 이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동화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두 편의 동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일은 ‘제대로 이기는 일’의 의미다. 경쟁은 어른들에 의해서 주입된 과제이기 때문에 어린이는 경쟁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한 동화가 택하는 길이 아니다. 어린이는 제대로 된 경쟁을 원한다. 그것이 성장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 성장은 때로는 아주 좁고 치열하게, 때로는 광대한 우주적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강나루와 소은하가 그랬던 것처럼.
추천기사
관련태그: 별빛전사 소은하, 5번 레인, 김지은 칼럼, 예스24, 채널예스, 추천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