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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미쓰백>, 백지영과 8명의 아이돌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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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에서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의외의 이야기들을, 서로가 서로의 관객이자 가수가 되는 장면이 펼쳐지는 이 프로그램을 되도록 크고 웅장한 언어로 의미부여하면서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2020.10.29)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온

‘여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3주에 한 번 글을 씁니다.


<미쓰백>의 한 장면

나인뮤지스 출신의 세라는 MBN 예능 프로그램 <미쓰백>에서 가영의 사연에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전 여기 와서 너무 감사해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혼자가 아니고...전 진짜 행복해요.” ‘당신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니, 하긴 나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주 운다. 분통이 터지기도 하지만 같이 울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좋다. 


감정을 드러내면 안 돼. 그게 부정적이라면 더욱

향년 39세의 최진실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던 날 최진실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몇 시간이고 누워 울다가 갔다는 이야기를 당시 다니던 한의원 원장님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설리와 구하라의 비보가 연이어 들렸을 때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내 주변의 20대들은 비슷한 말을 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고. 어쩌면 슬픔 혹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다루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걱정이었다. 단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이돌 산업이 만들어내는 감정구조의 문제라서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돌이 표출할 수 있는 감정표현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대중이 아이돌에게 원하는 감정 역시 매우 제한되어있다. 우리는 아이돌에게, 특히 여자아이돌에게 특정한 방식(귀엽거나 섹시하거나 발랄하거나 도발적이거나)으로만 반응하도록 세팅되어 있는 상태다. 현역 아이돌이 거식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강박 등을 고백하며 활동중단을 해도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고 지나간다. 이 무심함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다. 대중의 관심을 갈망하는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적절한 방식으로 통제해야만 생존이 가능한다는 것을 바로 이 무반응으로 통해 배운다. 

여성의 경우에는 감정에 대한 성별화된 규범 체계가 요구하는 바가 더 구체적이고 해소방식은 아예 부재하다.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감정은 보통 여성화된 영역으로 취급되고 그중에서도 크거나 부정적인 감정은 여성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여성에게 적당한 감정표현은 크기도 방향도 정해져 있다. 크기는 작게, 방향은 긍정적으로. 그러므로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루는 건 아주 중요한 능력이다. 여성주의 심리학자 미리암 그린스펜은 『감정공부』에서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신뢰하지 못할 때 그 에너지를 억제하고 조종하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이러한 감정의 억제는 바로 남성적 기준을 각인시키는 방식이라고 분석한다. 결국은 여자답게 행동하라는 명령이고, 남자처럼 굴지 말라는 강요라는 것이다. 미리암 그린스펜은 “우리가 감정을 의식적으로 참아낼 수 없을 때 그 에너지는 하강하여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행동들을 촉발시킨다”며, 이것을 ‘감정의 부메랑효과’라고 부른다. 


<미쓰백>의 한 장면

부정적인 감정을 크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감정의 부메랑효과는 문화적 수준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만성적으로 감정을 억압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인공적으로 자극할 거리가 필요하다. 이 인공자극은 불건전한 감정적 드라마로 치닫게 할 수도 있지만, 아주 의외로 ‘연예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감정을 폭발하는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고 그에 대한 반응이 다른 방식으로 가능해지기만 한다면 익숙하지만 낯선 다른 공간의 가능성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불태워라,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의 편저자 릴리 댄시거는 22명의 여성 작가에게 분노에 대해 써달라고 했는데 대다수가 분노하는 대상에 대해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냉철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며 여성의 분노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미쓰백>도 그러한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방영된 분에서) 백지영과 송은이는 이 프로그램이 사연팔이를 하는 또 하나의 감정적 포르노가 되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백지영은 밤에 일어나 먹는 모습이 찍힌 세라에게 “잠깐만, 이거 포즈(멈춤) 해줘봐. 이거 안 나갔으면 좋겠으면 얘기해”라고 말하고, 노출 수위가 심한 옷을 거부했음에도 티저 사진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 미쳤나 봐 진짜 왜 저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송은이는 자주 “말도 안 돼!”라고 소리치며 “××들 하고 있네. 무슨 ××같은 소리야 어디서 그런 짓을 하고 있어”라며 삐-소리로 처리된 욕설을 내뱉는다. 송은이의 미간이 심각하게 찌푸려져 있고, 백지영이 화내면서 울고 있는 모습은 나를 아주 안심시킨다.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어떻게 정신건강을 지켜내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고 있고, 여러 차원으로 대답해보려고 애쓰는 중인데 최근에 재미있는 피드백을 들었다. 어떤 분이 내 페이스북에 매일 매일 들어오는데 그 이유는 내가 자주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다는 거였다. 네? 놀라서 반문하며 하하하 웃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자주 화를 내지는 않는다. 꼭 필요할 때만 화를 내려고 하고,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는 때도 많다....진짜다...하지만 내가 화를 내는 걸 보는 것이 좋으시다니 뭔가 해방감이 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때로 이렇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미쓰백>의 한 장면

걸그룹 전성시대의 생존기

<미쓰백>은 걸그룹 전성시대에 걸그룹으로 생존하는 데 실패한 이들을 불러서, 이들을 걸그룹이 아니라 다시 가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걸 목표로 삼은 프로그램이다. 90년대 가요계의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1세대 걸그룹은 1997년~1998년에 데뷔한 핑클, SES, 베이비복스다. 걸그룹 전성시대라고 불리던 2세대의 시작은 2007년이었다. 원더걸스, 카라, 소녀시대가 한 해에 나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60여 개의 걸그룹이 등장해 1,300여 명이 활동했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건 소수다. 관심을 받았다고 해도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걸그룹 성공확률 0.001%. 제작진은 100그룹의 200여 명과 미팅을 하면서 걸그룹 전성시대에 걸그룹으로 생존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자해를 하고 치료를 받고 또 연습실에 왔는데” “대표님이 저를 여자로 대하셨어요. 귀를 만지시면서 예쁘다” “X년, XX년 죽여버릴 거라면서 (으허허허어어)” “얼음을 넣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머리 박고 있으라고” “저 왕따였어요. 나도 모르게 왕따였던거죠” “스폰해 볼 생각없냐..성기 사진을 보내는 분들도 있고” “그 회사 4년 있었는데 정산서를 한 번도 못 받았어요. 개같이 벌어서!” 

어떻게 보면 익숙한 이야기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이 시사고발프로그램이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시사고발프로그램의 문법에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드러내고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전개될 터인데, 예능프로그램에서는 멘토를 붙이고 참가자들의 관계성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찾는 식의 메이크-오버 문법을 따라간다. 리얼리티 예능의 문법 안에서 드러난 이야기들은 이들을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고난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입체적인 인물들로 그려낸다. <미쓰백>의 1~3회는 8명의 참가자들(소율, 레이나, 가영, 세라, 나다, 수빈, 유진, 소연)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보여줬다. 프로그램의 초기에 해당되는 3회차분 동안 이 8명에게는 각각 지금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주어진다. 


보여지는 몸, 보여주는 몸

세라는 데뷔 첫날 음악방송에서 가터벨트를 입고 춤을 춰야 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터벨트를 입은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화장실에서 도저히 눈물이 안 멈춰가지고... 그걸 입은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걸 입은 고등학생 동생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안 멈춰 10분 찍고 다시 나오고 그렇고 나서 (리더에서) 짤렸죠.” 가터벨트가 무슨 사자성어인줄 알았다는 세라는 가터벨트를 입고 무대에서 춤추는 자신에게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세라는 영어로 한국의 걸그룹을 소개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 1년에 6~70그룹이 데뷔하는데 다음 해까지 살아남는 그룹이 1%. 내가 그걸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가영은 19금 콘셉트로 큰 화제를 모았던 걸그룹 스텔라 출신이다. 처음에는 청순한 이미지로 시작했는데 대중의 반응이 없었고 이후 파격적인 19금 컨셉을 시도하자 스케쥴이 많아졌다고 했다. 대중에게 어떻게든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고 했지만, 문제는 섹시한 컨셉으로 한번 뜨면 다른 컨셉을 시도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흔히 걸그룹 생존은 3년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은 큐티하게 한번은 섹시하고 그리고 한번은 그중 반응이 좋은 걸로 하면 수명이 끝난다는 것이다. 섹시 컨셉에서 선을 넘어 19금 수준으로까지 가면 그때부터는 반응하는 시장 자체가 달라지기도 한다. 주요 소비자들이 팬덤이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성범죄자들이 ‘구매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가영은 그 경계를 경험하며 내상을 입는다. 성기사진을 보내고 스폰 제의를 하고 댓글로 선넘는 조롱을 당하는 일상. 가영의 옷장에는 어두운 색의 긴 옷이 채워져 있다. “제 다리를 제 살을 쳐다보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제가 이런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걸 인지를 못하고 있었어요. 언젠가부터 보니까 제가 그러고 있더라구요.” 문제는 노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노출의 의미와 방식을 누가 결정하는데 있다. 나다의 존재가 각별한 건 그 때문이다. 나다는 몸매를 드러내는 문제에 대해 “좋은 거는 보여드려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넉살 좋게 얘기하며, 트월킹을 처음 할 때만 해도 사람들이 싫다고 징그럽다고 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그런 나다를 보면서 가영은 부러워한다. 


<미쓰백>의 한 장면


서로가 서로를 응시할 때

『해방된 관객』에서 자크 랑시에르가 한 말을 빌리자면, “해방은 보기와 행위 사이의 대립이 의문에 부쳐질 때 시작된다.” 관객은 자신이 지각한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번역하고, 그렇게 지각한 것을 개별적인 지적 모험으로 연결한다. 지적 능력의 평등에 의거한 이 공통의 힘은 개인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그들이 자신의 지적 모험을 교환하게 해준다. <미쓰백>의 참가자들이 서로를 챙겨주며 서로의 자극이 되는 순간은 꽤 특별하다.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한국적 문화에서 막내 취급이라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빠질 게 분명한 유진에게 수빈이 막둥씨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장면 같은 것. 

가영이 선택한 곡이 이효리의 <블랙>인 것 또한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이효리는 1세대 걸그룹 출신으로 개인이 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섹시한 솔로 여자가수이면서 그 컨셉이 잡아먹히지 않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언젠가 이효리가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 섹시함은 컨셉이 아니라고. 자신이 불편해하면 관객들은 눈치를 채고, 나도 관객들의 눈치를 보게 될 텐데 나는 검정 브래지어 하나만 하고 무대에 올라가도 하나도 안 창피하더라고. 이효리가 한 이 말은 정확하게 성적 대상화가 되는 것과 성적 주체가 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터벨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세라와 촬영 당일 의상을 바꿔버린 환경에서 노출을 강요당했던 가영은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알 권리를 체계적으로 박탈당했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들의 이미지는 단지 섹시한 이미지인 것이 아니라 섹시하도록 강요당한 이미지로 상품화되어 관객에게 이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메시지로 전달되었다. 가영은 어두운 긴 옷이라는 변한 취향을 단지 트라우마의 증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나다의 태도와 이효리라는 확실한 레퍼런스, 그리고 자신을 응원해주는 동료이자 관객들 앞에 서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무대를 만들었다. 나는 이 시도들을, 이 무대를, 이 프로그램에서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의외의 이야기들을, 서로가 서로의 관객이자 가수가 되는 장면이 펼쳐지는 이 프로그램을 되도록 크고 웅장한 언어로 의미부여하면서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경쟁이 아니라 공생이라는 기획의도가 끝까지 유지되기를 바라며. 이들이 부디 버텨내기를. 그리고 끝내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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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김현영(여성학자)

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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