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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칼럼] 영화번역가가 드라마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오다니
<월간 채널예스> 2020년 9월호
드라마 속 영화번역가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직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환상을 품게끔 만들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길 건넸다. (2020.09.07)
번역 작업 중에 브라우저 한켠에 뜬 기사 목록에서 영화번역가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온다는 헤드라인을 봤다. 영화 번역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놀랍게도 신세경 배우. 이런 영화 번역계의 경사가 있나.
“처음 갔던 극장에서 본 영화 때문에 자막이 없다면 몰랐을 외국 말을 의식했고, 고마웠던 자막이 거슬리는 레벨에 오르자 주저 없이 번역가가 됐다.”
기사에 적혀 있던 드라마 속 영화 번역가 캐릭터 설명을 보고 SNS에 한 마디 올린 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신세경 배우와 이재훈 감독이 이 누추한 작업실까지 방문하는 사달이 벌어졌다.
이사 온 후로 짐을 그대로 쌓아둬 엉망진창인 방을 어떻게 보여주나 하는 걱정은 차치하고 캐릭터 연구차 오는 배우와 감독에게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덜컥 겁이 났다. 괜히 오시라고 했나. 영화 번역가라고 해봐야 말이 거창하지 기본적으로 외화의 대사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이 전부이니까.
낑낑대며 방을 치우면서도 머릿속에선 무슨 얘길 해야 하나 안절부절이었다. 걱정하던 마음은 탁자에 마주 앉아 몇 마디 나누는 사이 금세 사라졌다. 얘기를 나눠 보니 영화 번역가라는 직업에 관해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 대화가 막막하진 않겠다 싶었다.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기 편하니까.
대본을 쓴 박시현 작가는 영화 번역가라는 직업을 취재할 때 영화제 작업을 주로 하는 번역가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했다. 그래서 신세경 배우가 맡은 미주라는 캐릭터는 개봉관 영화를 번역하는 번역가인지, 영화제 작품을 주로 번역하는 번역가인지, 케이블 TV 외화나 해외 OTT 서비스 작품들을 번역하는 번역가인지 물어봤다. 외부에서 보기엔 어차피 자막을 만드는 사람들이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각각 시장과 작업 방식의 차이가 큰 편이다. 그래서 정확한 조언을 하려면 어느 군에 속하는지 알아야 한다.
간단한 캐릭터 배경 설명을 듣고 NDA(기밀 유지 협약)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거의 모든 걸 다 보여드렸다.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지, 일을 진행하는 과정은 어떤지, 내 작업실의 셋업은 어떤지. 작업 도중 자꾸 내 방으로 난입하는 우리 딸은 얼마나 귀여운지.
준비 중이라는 그 드라마가 영화번역가의 애환이나 성장을 다루는 드라마는 아니라서 이렇게 세부적인 것까진 알 필요가 없지만 지나가는 몇몇 컷이나 설정의 리얼리티를 위해서라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굉장히 구체적인 것들까지 질문했다.
신이 나서 온갖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는데 아내가 옆에서 뜯어말린다. 너무 당신만 신나서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 여보. 신나요. 언제, 누가 우리 직업 이야기를 이렇게 두 눈 초롱초롱하게 뜨고 들어주나요. 그것도 이렇게 멋진 배우님이.
아내도 경력이 꽤 많은 베테랑 번역가이기 때문에 우리 직업 얘길 이렇게나 장황하게 꺼내는 게 민망한 모양이다. 사실 여성 번역가라 아내가 할 얘기가 더 많을 텐데.
드라마 속 영화번역가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모르겠지만 이 직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환상을 품게끔 만들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길 건넸다. 커피숍에서 손바닥만 한 노트북을 펼쳐놓고 우아하게 커피 마시면서 작업하는 모습만 잔뜩 나오면 그 장면을 보는 번역가들이 얼마나 배꼽을 잡을 거야.
안 그래도 엉뚱한 환상을 갖고 진입하는 사람들이 많은 분야다. 누구 말마따나 그 환상엔 자의가 아닐지언정 나도 일조하고 있으니 면목이 없지만 환상은 환상이다. 그리고 환상은 허상이다. 간혹 그 허상이 현실로 존재하는 경우를 목격하더라도 그건 일반적인 현상(phenomenon)이 아니라 일시적인 사건(happening)이란 걸 잊어선 안 된다.
본디 번역가는 그늘에서 묵묵히 그리고 치열하게 원문과 고독하게 싸우며 사는 직업이다. 기사에 나오는 캐릭터 설명처럼 외화 자막이 거슬리는 레벨이 된다고 주저 없이 뛰어들어서 될 수 있는 직업도 아닐뿐더러 어지간한 각오가 없이는 평생의 생업으로 삼기도 어려운 직업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미주가 어떤 영화들을 번역할지, 어떤 클라이언트와 일할지, 집에선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내 뇌리에 가장 인상적으로 박힌 여성 영상번역가의 모습은 예쁜 하이힐을 사놓고도 신고 나갈 기회가 없어서 책상 아래 신문지를 깔고 새 하이힐을 신은 채 일하는 모습이다. 남자 버전으로는 조던 농구화가 있다.
짠하면서도 치열한, 일을 사랑하면서도 늘 일에 치이는, 단조로운 패턴의 일이지만 일 자체는 단조롭지 않은, 이 희한한 직업을 어떻게 그려줄 것인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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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