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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칼럼] 이 번 역 은?
<월간 채널예스> 2020년 8월호
“이 번역은”이란 화두를 기다려온 번역가들도 있을 거다. 번역이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한 번역가가 있을까.(2020.08.05)
오늘은 오랜만에 서울에서 미팅이 있는 날이다. 미팅을 잔뜩 쌓아뒀다가 콩 볶듯이 하루에 다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보통 미팅 장소가 서울이라 가능하면 하루에 다 모는 편이다. 일산 주민에게 강남은 멀어도 정말 너무나도 멀다. 미팅을 오래 쌓아두면 하루에 미팅을 네 개나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별수 있나. 역병이 도는 시기에 갓난아기 아빠가 외출을 자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1년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히키코모리형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가끔 이렇게 서울 구경을 나서면 괜히 설렌다. 평소엔 일 핑계로 읽지 못하고 쌓아둔 책을 두 권이나 챙기고 지하철용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꽉꽉 새로 채운다. 목이 마를지 모르니 생수도 한 병, 비상시를 대비해 보조 배터리도 하나, 복잡한 서울에서 누가 채 갈지도 모르니 지갑은 가방 제일 깊은 곳에 넣자.
두툼해진 가방을 메고 지하철을 타면 원대했던 이상과 다르게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늦은 새벽까지 일하고 잘 시간에 이렇게 일찌감치 나왔으니 멀쩡할 리가. 그러다 정신이 들면 책을 읽다가 음악도 듣다가. 몇 번이고 자다 깨도 강남까진 아직 멀었다.
책도 음악도 지겨우면 멍하니 풍경을 구경한다. 경보 선수 뺨치게 빨리 지나가는 등산복 차림 아저씨, 필요도 없는데 자꾸 사고 싶게 만드는 잡상인의 말발, 공무원 고시 영어 문제집을 펼쳐 놓고 공부 중인 옆자리 수험생(그거 2번이 아니라 3번이 정답인데...), 흙 묻은 신발을 신은 채 엄마 허벅지를 밟고 선 아기, 대낮부터 불콰하게 취해 언성을 높이고 계신 어르신들의 랩 배틀, 난생 처음 듣는 외계어인지 비속어인지를 쉬지 않고 뱉는 고등학생들.
오랜만에 보는 광경들이라 새삼 쳐다보다가 원체 남에게 무심한 성격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단조로운 일을 하다 보니 복잡한 풍경이 낯선 건지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그러다 정말 의외의 장소에 시선이 박혔다.
객차 천장에 붙은 전광판. 전광판이 몇 개 국어로 쉴 새 없이 정차역을 안내하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전광판에 꽉 차게 등장한 한국어 안내.
“이 번 역 은”
이 네 글자가 뜨고 한참 동안 다음 화면으로 바뀌질 않는다.
‘왜 띄어쓰기를 안 했지?’
‘이 번역은? 이번 역은?’
‘이 번역은 뭐 왜 뭐? 뭐 어디 문제 있어?’
‘이 번역은... 누구 번역인데?’
‘나만 이런 생각 하나? 저거 보고 오해하는 사람 진짜 없어?’
‘이게 아재 개그일까, 직업병일까?’
‘나 미친 거 아니야?’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지나갈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는데 전광판이 바뀌질 않는다. 이 정도 길게 생각했으면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바뀌었다. 약수역이란다.
관객들이 본격적으로 자막 번역 이야기를 하게 된 게 약 5~6년 전이다. 그전에도 이야기는 있었지만 일부에 그쳤고 지금처럼 영화 번역 관련 기사가 대대적으로 난다거나 온갖 칼럼이 쏟아진다거나 각종 커뮤니티에서 영화 번역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어느 때보다 번역에 민감한 시절에 살고 있다 보니 이젠 누가 “이 번역은...”이라고 운만 떼도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이런 강박이 심해지면 불안장애나 공황장애, 강박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나는 이미 한 차례 저 멀리까지 떠내려갔다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 돌아오기 한결 나은 환경이긴 하다. 혼자였다면 더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이 번역은”이란 화두를 기다려온 번역가들도 있을 거다. 번역이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한 번역가가 있을까. 그 화두가 만들어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화두가 된다는 건 수많은 담론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모적이고 무가치한 담론도 있을 것이고 그에 못지않게 건전하고 유의미한 담론도 있을 것이다. 그 담론과 직결되는 직업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나는 그 담론에 귀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게 아무리 괴롭더라도 피해서는 안 되고 이런 추세로는 앞으론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용감하게, 혹은 담담하게 맞서서 토론하고 배우고 반성하고 성장할 뿐.
아무도 유심히 보지 않는 “이 번 역 은” 네 글자가 두 시간 가까이 머릿속에서 천 갈래, 만 갈래로 가지를 친다. 놔두면 어디까지 갈까... 이번 역은 교대역이란다. 내릴 준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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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