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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운의 부귀영화] 오월은 어린이와 나뭇잎만 푸르다

전고운의 부귀영화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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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기억의 방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따금 외할머니 방에 조용히 들어가곤 한다. 그 방에는 힘이 넘치던 시절의 할머니와 할머니를 사랑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2020. 05.07)

오월은 어린이와 나뭇잎만 푸를 뿐.jpg

일러스트_ 이홍민

 

 

오월의 시작과 함께 긴 연휴가 있다는 것은 독학으로 알게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연휴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게 쓸쓸해졌지만, 괜찮았다. 뉴욕, 뉴욕 같이 신나는 연휴, 연휴니까. 부처님 오신 날인 연휴의 첫날은 산처럼 쌓인 일에는 손도 안 대고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누운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근로자의 날인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소파로 이동 후 누워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근로자인가?‘

 

그래서 근로자의 정의를 찾아 봤다. 근로기준법 제2조 1항의 정의에 따르면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고 한다. 나는 저항 없이 조용히 책가방을 싸서 집을 나섰다.

 

좋은 날씨였다. 오월이 왔구나. 어버이날, 결혼기념일, 자동차 보험금 갱신 납부 등 무자비한 지출의 달 5월은 결혼 후 가장 두려운 달이 되었다. 양가 어버이들과 남편 선물, 자동차 보험금 예산들을 암산으로 합계를 내보다가 ‘왜 더 적극적으로 근로를 제공하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들면서 계산도 근로도 없던 어린이 시절이 그리워졌다.

 

누구에게나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기억의 방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따금 외할머니 방에 조용히 들어가곤 한다. 그 방에는 힘이 넘치던 시절의 할머니와 할머니를 사랑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방문을 열면 외할머니의 집이 보인다. 앞마당이 있던 한옥의 전경, 문 옆 개집에 묶여 있던 점박이 무늬였던 ‘둘리’, 화단에 피어 있던 제비꽃과 양귀비꽃, 할미꽃, 마당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던 길에 있던 연탄 보일러, 길쭉한 모양이었던 재래식 부엌 구조, 부엌의 다른 문 뒤에 비밀인 듯 숨겨진 뒷마당과 창고, 그 너머로 보이던 뒷집의 마당까지. 그렇게 도로에 밀려 사라진 외할머니의 집 구조를 더듬어 보는 시간은 애틋하다.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키운 분은 외할머니였다. 남녀 차별이 심했던 친할머니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오빠와 나를 전혀 차별하지 않았고,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위로와 행복이었다. 그때 나는 친할머니, 외할머니라는 단어에 불만이 많았는데, 왠지 친할머니가 더 친한 할머니를 뜻하는 것 같이 느껴져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끼어있는 ‘외’는 우리 사이의 친밀함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싫었다. 할머니가 누구는 ‘친손주’라 소개하고 나는 ‘외손주’라고 소개할 때 제일 그랬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 느낌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친할머니의 ‘친’은 ‘친할 친’이고, 외할머니의 ‘외’는 ‘바깥 외’자 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바깥 할머니라니. 어서 빨리 아버지 쪽은 ‘친’을 붙이고, 어머니 쪽은 ‘외’를 붙이는 시대착오적인 표기법이 바뀌어야만 한다. 30년 동안 안 바뀌고 있다니 놀랍다. 나라도 지금부터 그냥 ‘외’자는 갖다 버리고 할머니라고 적어야지.


나의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셨다. 그 시절에는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손가락질 받는 일이어서 어렸던 엄마에게는 그게 큰 상처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담배 피는 모습이 부끄러워 집에 친구도 잘 데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에게는 상처였지만, 난 전혀 상관없었다. 그냥 박카스, 까스활명수와 같이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처음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가 재미있는데, 임신을 하고 입덧이 너무 심해 고생할 때 주변 어른들이 담배를 태우면 메스꺼움이 나아진다고 권해서 피웠고, 정말로 메스꺼움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한두 대 피우던 것이 습관이 되셨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가 담배를 입에 물고서 사촌 동생들의 젖병을 열심히 흔들던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남자들이 서부극의 무법자가 담배 물고 무표정으로 총을 쏘아대는 모습에서 로망을 느끼는 것처럼 비슷한 느낌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나는 할머니가 가는 곳은 언제나 함께했고,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했으며, 먹는 것은 다 따라 먹었다. 할머니가 달고 사시던 박카스와 까스활명수까지. 나에게는 천사 같았던 분이었지만, 며느리들에게는 표독스러운 시어머니였고, 엄마에게도 어려운 존재였다는 것은 철이 들고 나서 알게 된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알던 모습과 남이 아는 모습이 너무 달라 충격적이었지만, 나이가 들고는 모든 얼굴들이 이해가 됐다.

 

할머니는 모든 면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를 혼내지 않고, 딸이라고 차별하지도 않았으며, 별나다고 흉보지도 않았던 유일한 사람. 우리 고운이 시집가는 것은 보고 죽어야 되는데 라고 입에 달고 살던 할머니와 ’할매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를 자주 말하던 우리는 환상의 콤비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그 콤비는 사라졌지만. 나는 성장하느라 계속 바빠졌고, 할머니는 바쁘게 늙어갔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그때도 바쁘다는 이유로 찾아가지 않았다. 요양원에 계시는 긴 세월 동안에도 두 세 번 밖에 찾아 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조용히 늙어가는 동안 나는 아무 위로도 되어주지 않았다. 할머니에 대한 내 태도 변화를 지켜보며 일찌감치 내가 의리 없고, 배신 잘하는 인간인 것을 깨달았다.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더 의리 있는 척하고 노력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이 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타인의 배신에도 관대해졌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자식들에게 최소한의 폐를 끼치려 노력하느라 조금씩 작아지시다가 내가 결혼하고 이 년 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된 것은 내가 결혼하는 거 본 거 그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오월이 되고 어버이날이 다가 오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할머니다. 할머니는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온 적이 있었을까? 극장에는 가 본 적 있었을까? 내가 애도 안 낳고 영화나 겨우 찍었다는 것을 알면 좋아해 줬을까? 어른이 되고 나서 묻고 싶은 것은 쌓여 가는데, 물을 상대가 없어서 씁쓸해진다. 그럴 때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서울에 있는 극장의 한 상영관을 빌려서 ‘소공녀’를 할머니와 단둘이 보는 것이다. 담배 마음껏 피우며 보시라고 할머니 옆에 재떨이와 담배 그리고 라이터를 준비해두고, 언제든 드시라고 좋아했던 양갱과 박카스 까스활명수도 내 무릎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영화 속 내가 만든 인물과 할머니가 같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할머니는 주인공인 미소가 담배 피운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보다 미소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 두려운 일이다. 옛날 사람으로 보일까 봐 한창 신경 쓰이는 걸로 봐서는 진짜 옛날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고, 그걸 들킬까 봐 두렵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자주 옛날이 그립고, 할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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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고운(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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