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디자인 특집] 슬기와 민, 거짓말하지 않는다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거짓말하지 않는다. 즉 예쁜 책을 만들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념적으로 책 디자인의 관습을 비틀거나 응용해 책 자체에 관해 질문하는 디자인을 많이 하는 편이다. (2020.04.14)
사진 박순애
슬기와 민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종횡무진하는 동시에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단독 전시도 진행한다. 하지만 보폭 넓은 이 듀오 디자이너의 책과 책 디자인에 대한 작업 포션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웹사이트에 인증한, ‘책 또는 책 아닌 책’ 카테고리에 올려둔 작업 결과물부터 그렇다. 시선을 끄는 건 ‘책 아닌 책’이라는 각별한 문구다. 우리에게 익숙한 책, 그리고 또 다른 물성으로서의 책을 디자인하기 위해 슬기와 민이 던지는 질문은 한결같다. 책은 무엇인가?
지난해 ‘전문가가 선정한 올해의 북 디자인’에 조르주 페렉 선집이 꼽힌 바 있다. 디자인 과정이 궁금하다.
문학동네 조르주 페렉 시리즈 표지에는 늘 초상 하나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지를 처리하는 방식은 책마다 다르다. 같은 바탕을 책마다 달리 변주하는 방식이 디자인의 재미다. 예컨대 첫 책인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에서는 ‘액자’와 ‘복제’가 주제였는데, 표지에도 그림 속에 그림이 무한히 반복되는 모습을 표현했다. 『인생 사용법』 에서는 페렉이 파리의 한 아파트 건물에 있는 방들을 묘사하는 데 (그리고 책의 99개 장을 구성하는 데) 사용한 체스 행마법 도표를 글자와 숫자로 이루어진 초상에 결합했다. 이렇게 디자인의 기본 개념을 세웠다면 ‘과정’은 책마다 상당히 다르다. 책임 편집자인 송지선 씨가 책에 관한 본인의 시각이나 감상을 친절히 알려주는데,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구상한다. 이런 구상을 늘 검정과 보조색 하나로 이루어진 단순한 색상 팔레트에 맞춰 시각화한다.
단도직입해 슬기와 민 디자인을 가장 잘 말해 주는 단 한 권을 꼽는다면?
우리 스스로 쓴 『작품 설명』. 영어와 한국어로 출판했다. 크기와 재료도 마음에 들고, 독서를 통해 우리 작품이 다르게 그려지는 것도 흥미롭다. 내년 초 교토에서 개인전을 할 예정인데, 이에 맞춰 일본어판을 더할 생각이다.
『작품 설명』은 작품 설명문을 엮은 책. “작품은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를
엄격하게 반대로 실천한 작품이다.
북 디자인에서 슬기와 민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거짓말하지 않는다. 즉 예쁜 책을 만들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아예 안 한 건 아니니 “거짓말을 덜한다”고 해도 좋다. 한국 출판 디자인의 ‘본가’(민음사, 정병규 북 디자인, 안그라픽스 등)와 관계없이 책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나름 의미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개념적으로 책 디자인의 관습을 비틀거나 응용해 책 자체에 관해 질문하는 디자인을 많이 하는 편이다.
『Perspecta 36』 책 외관뿐 아니라 편집에도 개입하는 디자인 패턴도 이때 정립됐다.
직접 디자인한 책 세 권을 골라 주석을 단다면?
책마다, 분야마다 성격이 달라 디자인을 맞비교하긴 어렵고, 우리의 선호도도 그때그때 달라서 세 가지로 추리기는 어렵다. 너무 특이하거나 사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그나마 일반 독자가 ‘책’이라고 알아볼 만한 작품으로 국한하면 얼른 다음 세 책이 생각난다. (물론 내일이면 생각이 달라질 테지만.) 일단 『Perspecta 36』. 우리가 협업한 첫 번째 책이다. 그야말로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었다. 이 책을 만들 때 알게 된 사실이 아직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모양이 바른 책을 만들려면 인쇄보다 제본이 중요하다는 것. 공연 예술 기획자 김성희와 미술가 서현석이 중심이 되어 기획 편집하는 『옵.신』 시리즈도 중요하다. 특히 『옵.신』 4호는 책의 개념과 디자인,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작품이다. 주제가 ‘도시 걷기’이고, 필진 없이 인용구로만 이루어진 책이다. 다음은 조해나 드러커의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 . 번역과 디자인의 관계에서 재미있는 사례다. 이 책은 형식이 어떻게 의미를 생산하는지 - 본문 내용뿐 아니라 자체 타이포그래피로도 - 시적으로 설명하는 작품이다. 한국어판 디자인은 원작 내용뿐 아니라 형태도 ‘번역’하려 한다.
『옵.신』 4호의 본문은 모두 일정하지 않은 각도로 비뚤배뚤 돌아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나침반에 의존해 거리를 걷는 느낌이 든다.
북 디자이너마다 작업 방식이나 과정이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는 무엇인가?
모든 단계가 다 중요하지만 첫 단계와 끝 단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첫 단계는 디자인을 기획하는 단계이니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특히 우리는 시각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방향에 관해 오래 토론하는 편이다. 그 과정에서 시각적 디테일도 상당 부분 정해진다. 마지막 단계란 일이 우리 손을 떠나는 때다. 인쇄 원고를 정리하고 인쇄와 제책 공정에 데이터를 전달하는 단계.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이나 기계를 거쳐야만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온전히 다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책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커버에 이런 문구가 있다. “좋은 디자인은 어때야 한다는 법을 잊어라. 당신에게 좋은 디자인은”. 여기서 끊긴 문장을 마무리한다면?
이 책을 사서 펼쳐 보면 알 수 있다.
슬기와 민에게 영향을 준 디자이너가 궁금하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카럴 마르턴스(Karel Martens)가 디자인한 모든 책은 중요한 교과서였다. 책 디자인에서는 특히 그렇다. 영국 디자이너 리처드 홀리스(Richard Hollis)의 작품에서도 제법 영향받았다. 둘 다 정통 출판 디자이너는 아니고, 그래픽 디자인과 현대미술이 중첩하는 지대에서 활동했다는 점도 우리와 상통한다.
한국 북 디자인 신의 최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조금 과장하면 대형서점에 진열된 책이나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유통되는 아트북이나 겉보기에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제목 없는 앞표지, 차례나 본문 일부가 노출된 표지, 단순히 예쁜 디자인이 아니라 특정 취향 집단을 겨냥해 고도로 코드화된 디자인 등, 과거에는 이른바 ‘독립 출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기법들이 일반 출판물에도 적지 않게 쓰인다. 표지와 속장의 디자인이 좀 더 통합되는 경향도 엿보이고, 심지어 본문에서 왼끝 맞추기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는 번역자(최슬기)가 직접 디자인까지 진행하면서,
원본에 부합하는 시각적 배열이 언어적 번역에 끼친 영향을 증거처럼 보여준다.
눈에 띄는 혹은 좋아하는 북 디자이너가 있다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을 집요하고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전용완, 마티에서 출판 디자인의 관습을 과감히 부순 오새날, 돌베개에서 주류 출판계에서는 놀라울 만큼 개념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김동신이 특히 눈에 띈다. 민음사 디자이너 유진아도 안정감 있으면서 관습적이지 않은 디자인을 꾸준히 내놓는다. 미술 출판 쪽은 워크룸, 신신(신동혁 신해옥), 홍은주, 김형재, 프론트 도어(강민정 민경문), 프레스 룸(양지은) 등이 좋은 작업을 한다.
슬기와 민이 올해에 거는 기대가 궁금하다.
올해는 책을 몇 권 ‘써야’ 한다. 동시대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평론도 써야 하고, 그래픽 디자인 전시에 관한 책도 낼 계획이다. 책에서 벗어나면 올가을 개인전을 준비 중인데, 처음으로 영상 작품만으로 이루어진 전시회로 구성할 예정이다.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밥길 저 / 민구홍 역 | 작업실유령
여러모로 쓸모 있는 디자인 교재다. 길은 30여 년 동안 몇 가지 직업을 거치며 터득한 제 디자인 방법론을 관련 작품과 함께 조목조목 정리하고, 단호하지만 격의는 없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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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벅> 저/<권혁> 역6,000원(0% + 5%)
누구나 한 번 산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기 쉽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른다. 그래서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진리다. 한 번 겪고 지나간 일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복습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습은 가능하다. 인류에겐 3000년 동안 쌓인 지식이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