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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최종화 : 그분들은 별이 되어
『마터 2-10』 연재
진오는 반대편 담장 밖에 모인 행사장의 시민들을 향하여 외치기 시작했다. 그가 굴뚝에 오른 이유, 농성 중 가장 기쁘고 슬펐던 일, 그리고 여러 투쟁현장에서 죽어간 노동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2020. 03. 18)
<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그는 소리를 내어 페트병의 이름을 불러본다.
깍새 꼬마야, 진기 쪼다 놈아, 지숙이 누나야, 주안댁 구신할머니, 신통방통 신금이 할머니이.
이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지상의 산 사람들 영역으로 돌아간다는 걸 저들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들을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버릴 수는 없었다. 진오는 털썩 주저앉아서 주머니칼로 이름자 부분을 도려냈다. 그 조각들을 하나씩 거두어 호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했다.
여기야, 혼자 한 걸음만 내딛게 놔줘요.
그리고 그는 앉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알잖아……내 꽃……, 나는 내 꽃에 책임이 있어! 게다가 그 꽃은 너무 약해! 그렇게도 순진하고, 세상에 맞서 제 몸을 지킨다는 게 네 개의 가시밖에는 없어…….
나는 더 이상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주저앉았다. 그가 말했다.
봐요……끝났어요…….
그는 또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일어났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발목께서 노란빛이 반짝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나무가 넘어지듯 천천히 넘어졌다. 모래밭이라 소리조차 없었다.
그가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다른 별에서 온 아이가 사막의 조난자와 작별하던 마지막 순간이다. 진오가 굴뚝 위에서 밤마다 올려다보았던 별들은 늘 희미하거나 흔들렸다. 도시의 조명 때문에 수많은 별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가까스로 견디어 낸 몇 점의 별들만 보였다. 그 별들과도 작별이다.
느릿느릿 날이 밝았고 아침이 되었다. 진오는 긴긴 겨울을 넘기고 지난봄부터 다시 셋 동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팔굽혀 펴기를 하면서 상체를 들어 올리고, 다리를 모아 앉은 자세로 쪼그렸다가 일어서면서 팔을 쳐들고 펄쩍 뛰어오른다. 다시 앉은 자세를 취하고 다리를 펴고 팔굽혀 펴기로 돌아간다. 겨울을 지나고 봄에 다시 시작했을 때에는 열 개도 힘이 들었다. 이제는 스무 개를 거뜬히 할 수 있고 기력이 좋은 날엔 스무 개를 넘어 두세 번 다섯 번 더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오늘 스무 번을 간신히 채우고 동작을 멈추었다.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꾀가 났나, 기합이 빠졌나.
그는 다시 짐 정리를 하고 버릴 물건들을 따로 모아둔다. 어제 밑에서 올려준 지함들에 이삿짐을 꾸려 넣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여덟시가 되자 오늘은 김 형과 막내 차군이 함께 쉼터 취사반이 꾸려준 아침밥을 짊어지고 찾아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난간에 기대서서 그들이 발전소 정문을 통과하여 굴뚝을 향하여 다가오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난간 앞에 서있는 걸 보고 김과 차는 손을 흔들었고 진오는 두 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당직을 서던 의경은 그들이 꺼내놓은 것들을 대충 점검했다. 진오가 도르래에 달린 바구니를 내렸고 아침밥이 올라왔다. 차군이 입에다 손을 대고 한마디 외쳤다.
“오전에 협상이 타결되면 두 시에 내려올 수 있답니다.”
김 형도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전화 할게.”
그들은 들어왔던 길로 다시 돌아서 정문을 나갔다. 잠시 후에 휴대폰이 웅웅거렸다. 김이 말하고 있었다.
“지루하겠지만 좀 참어.”
“사백하구두 열흘인데 오백 채우자.”
진오가 웃으며 말했지만 실은 동료들이 보이자마자 소변 마려운 것처럼 아랫배에서 가슴속까지 설렘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경찰은 어제까지 입장을 바꾸지 않았어. 이형이 내려오면 오늘 세 시에 환영대회가 열리고 모두 만나게 될 거야.”
“잡아넣겠다면 들어가 살지 뭐.”
진오의 말에 김 형의 목소리와 어조가 바뀌었다.
“무슨 싱거운 소릴 하는 거야. 이런 정세에 귀한 승리를 쟁취했는데. 조합원은 물론이구 천만 노동자가 자넬 지켜보고 있다구. 다른 장기투쟁을 거친 사업장들을 생각해 보아. 이건 우리들만의 투쟁이 아니야.”
“고마워, 농담도 좀 하구 살자.”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진오는 콧날이 시큰했다.
진오는 아침밥을 열심히 먹었다. 다시 점심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김 형이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누구보다도 진오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중공업, 전자, 자동차 회사 등의 수많은 사업장에서 노사합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합의를 했다 치더라도 자본 측은 언제 이를 파기할지 몰랐다.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를 분열시키고 약화하려 하거나, 용역깡패와 국가공권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려고 한다. 심지어 합의란 깨지기 위해서 한다는 자조적인 말도 있었다. 우리가 정말 이긴 게 맞을까?
점심때에는 쉼터의 취사를 맡은 여성 해고자들 두 사람이 밥반찬 보퉁이를 들고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가구요?”
굴뚝 위에서 진오가 큰 목소리로 물었더니 한 사람이 입가에 두 손을 갖다 대고 외쳤다.
“몇 분은 경찰서 갔구요, 노조에선 행사 준비하구 있어요.”
밥 바구니가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는 이게 마지막 식사라고는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국물이 든 보온병을 들어 밥그릇에 부었다. 말아먹지 않으면 오늘따라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였다. 또한 쉼터 여성들이 아래에서 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밥 바구니가 내려가고 그녀들도 손을 흔들며 떠났다. 한 시가 되자 발전소 담장 밖이 소란해지면서 닭장버스가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리창마다 철망을 붙인 닭장차는 십여 대 되는 것 같았다. 차들은 발전소 담장을 따라 줄지어 길게 늘어섰다. 정문이 활짝 열리고 버스에서 내린 의경 병력이 오와 열을 갖추고 구령에 따라 발을 맞추어 정문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빈틈없는 시위진압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머리에는 철망달린 헬멧을 쓰고 두툼하게 누빈 방호복 입고 곤봉을 차고 한 손에는 방패를 들었다. 그들은 굴뚝 아래로 행진하여 굴뚝 주변을 둘러쌌고 일대는 정문 쪽에서 오는 길을 차단하고 섰다. 다른 일대는 정문 앞을 막아섰고 행렬 앞에 굵은 쇠파이프의 바리게이트를 쳐놓았다. 무전기를 가진 사복들과 날렵한 복장에 헬멧만 쓴 기동대는 경비실 뒤편에서 대기 중이었다. 요란한 굉음이 들리면서 육중한 몸집의 크레인 차가 천천히 다가왔다. 기동대가 바리게이트를 젖히고 정문을 활짝 열었고 크레인 차는 정문을 매우 조심스럽게 천천히 통과하여 굴뚝 아래 공터까지 들어와서 멎었다. 맨 마지막에 경찰의 현장 지휘차량으로 보이는 미니밴이 나타났고 정복을 입은 경감을 비롯한 몇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경비실로 들어갔다.
멀리서부터 확성기 소리가 들리면서 행진곡 풍의 노동운동가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노동자의 대열이 나타났다. 그들은 정문 부근에 와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의경들을 향하여 다가왔다. 의경들은 방패를 빈틈없이 세워 그들을 차단했고 노동자의 행렬은 방패 바로 앞에 맞서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찰 측에서는 확성기로 경고했다. 아 아, 질서를 지키고 허용된 장소에서 집회를 해주세요.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면 법에 따라 처벌하겠습니다. 김 형이 방패를 든 행렬의 왼쪽으로 다가가서 지휘자인 듯한 작업복 차림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그를 따라 정문을 통과했다. 그는 경비실로 들어갔다. 무엇인가 피차에 확인을 했던 것 같았다. 김 형은 나오더니 손짓을 했고 정, 박, 차 등 농성 당사자들과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와 그의 아내가 시위 군중을 헤치고 나와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굴뚝 아래까지 이르렀고 의경들 틈에 서서 굴뚝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윤복례는 수고 많았다 우리 아들! 어서 내려오너라! 하며 외쳤고 아내는 그저 두 손을 쳐들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고는 두 여자가 서로 붙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발전소 뒤편 공터에서는 시민사회 단체의 연대 문화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휴대폰을 통해서 김형이 진오에게 말했다.
“구속 방침을 철회하기 전에는 내려오지 마. 지금 상부에서 검토 중이래.”
“알았어. 이제부터 여름인데 버틸만 하다구.”
세 시간이 지나서야 크레인이 작동을 시작했다. 받침대에는 김 형과 정씨가 올라탔고 형사 두 사람도 함께 탔다. 받침대가 난간에 닿자 김형이 먼저 내렸고 정씨는 형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면회할 시간 좀 줍시다.”
형사들은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굴뚝 테라스로 건너가기가 내키지 않았던지 받침대의 쇠 난간을 꼭 붙잡고 말했다.
“하여튼 빨리 끝내쇼.”
김 형은 진오에게 속삭였다.
“체포영장이 이미 떨어져 있다고 큰소리를 치더군. 오늘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널리 알려야지. 여론 때문에 오래 붙잡아 두진 못할 거야. 어떡하냐, 식구들 저 아래 와있는데 밥두 한 끼니 같이 못먹구…….”
“집에들 있으라니까, 어머닌 왜 따라 나선 거야 참 나.”
“알았지? 강제루 끌고 가려면 그냥 땅바닥에 누워버려. 시간 끌다 최대한 저항해야지. 우리두 몸부림을 칠 테니까.”
그들은 꾸려 두었던 이삿짐을 크레인 받침대 위로 건네고 동료들이 받았다. 받침대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정이 쌕에서 무선 미니핸드마이크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형사가 손을 뻗치며 잡아채려 했다.
“어, 안돼요, 이거 약속위반 아뇨?”
“여기서 실랑이하다간 다 죽는 수가 있어요.”
김형이 으르대자 형사들은 물러섰다. 진오는 반대편 담장 밖에 모인 행사장의 시민들을 향하여 외치기 시작했다. 그가 굴뚝에 오른 이유, 농성 중 가장 기쁘고 슬펐던 일, 그리고 여러 투쟁현장에서 죽어간 노동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이름을 외칠 때 군중들도 그를 따라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저는 굴뚝우주선을 타고 날아가 소중한 별들을 만났습니다.”
이진오는 손가락으로 저물어가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들은 별이 되어 저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크레인이 서서히 내려가면서 담장이 이진오의 시야를 차단했다.
이진오는 한 달쯤 지나서 우여곡절 끝에 석방되었다. 이제 합의에 따라 해고자 가운데 끝까지 버틴 열 한 사람이 복직을 할 차례였다. 그들은 서울에서 모여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에 있다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공장에는 녹슨 기계 몇 대가 남아 있었고 다른 노동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숙소라고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연립주택이었는데 벽에는 곰팡이가 가득 피어나 있었고 비닐 장판이 젖혀진 방바닥은 군데군데 꺼진 곳도 있었다. 화가 치민 그들이 본사에 전화했지만 직급이 높은 자와는 통화할 수가 없었다. 일반직원은 곧 신입근로자를 모집하여 내려 보낼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들은 허탈하게 웃기도 하고 서로 싸움질도 했다. 더러는 떠나고 몇 사람은 남았다. 폐허를 떠나 고속버스 정류장 앞에서 각자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마지막 남은 다섯 농성자들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며 소주잔만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형이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
막내 차군도 말했다.
“저두요. 김 선배 저두 올라가겠어요.”
그리고는 아무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마터 2-10>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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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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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 방대하고 강렬한 서사의 힘 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들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세계적인 거장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백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