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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특집] 정보라라는 우연한 세계

<월간 채널예스>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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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르에는 장르만의 특징이 있지만, 장르에 맞는 소재를 찾고 어떻게 발전하는지는 작가들이 계속 연구해 나가겠죠.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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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는 SF 작가이면서 SF 작가가 아니다. SF를 쓰지만, SF를 쓰려고 작정한 경우는 별로 없다.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쓰면서 내용에 걸맞은 장르에 연착륙하는 걸 즐기는 듯한 이 작가의 우연한 세계는, 장르에 대한 좁은 독해와 좁은 관념을 가로지른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SF 신에 발을 들이고, 과학소설작가연대에 적을 둔 걸 다행이라 말하는 정보라 작가가 말하는 아이덴티티는, ‘그냥’ 작가다. 그렇게 한국 SF 신은 두께를 넓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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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작가연대 프로필에 “드디어 SF 작가가 되어 몹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썼어요.


저는 사실 SF를 되게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했고, 쓸 생각도 없었어요. 비현실적인 얘기를 많이 쓰는 편인데, 「씨앗」이라는 작품이 2014년 국립과천과학관 제1회 SF 어워드에서 우수상을 받으면서 SF작가연대에 발을 들이게 된 거예요. ‘나는 SF 작가가 아닌데’ 하면서도 유수의 한국 작가가 모여 있어서 그냥 있기로 했어요. ‘쫓겨나지만 않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했죠.(웃음)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라고도 했어요.


20세기 러시아문학이 전공인데, 그중에서도 1920~1930년대 스탈린 시대를 공부했어요. 이 시대 작가들이 굉장히 특이한 소설을 많이 썼어요. 혁명을 직접 겪고 새로운 나라를 제 손으로 만든다는 자부심과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엄청난 사회 변화를 작품에 담아냈는데, 그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 어느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거예요. 이때 쓰인 훌륭한 작품과 문학성 높은 작가들이 스탈린 시대를 거치면서 잊혔는데, 그 원고들이 아직도 KGB 문서고 속에 있어요.

 

작가님을 사랑에 빠지게 한 작가와 작품이 궁금하네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라는 작가예요. 플라토노프는 굉장히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에 지극히 현실적이고 건조한 상황을 섞어 쓰는데,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작품을 썼어요. 공업학교와 건설학교를 졸업하고 댐 측량기사로 일하면서 작품을 썼는데, 당시 소련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공학과 수학 전공자들이 자기 노동과 과학의 경험을 글에 담아내는 게 권장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 배경 때문에 플라토노프의 초기 소설은 다 SF예요. 주인공이 무한 동력을 개발하거나, 원자 흐름 안에서 영원한 에너지 순환의 비밀을 찾아내 영생을 꿈꾸거나, 달에 가기 위해 로켓을 개발하거나. SF로 한정하면, 제가 읽은 것들은 그런 소비에트 SF, 폴란드 SF, 유토피아 소설이었어요. 남들은 읽지 않을 SF들인데, 실제로도 번역이 전혀 안 된 작품들이에요.(웃음)

 

단편집 『저주토끼』 가 영국에 판권이 팔렸다고 들었어요.


영국 Honfordstar 출판사에 팔려서 번역 중이에요. 표제작인 「저주토끼」가 저주를 다룬 얘기이고, 나머지 작품은 귀신 얘기, 피임약을 먹었는데 임신한 이야기,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 이야기 등 다양해요. SF는 한 작품 정도 있고요.

 

지금까지 쓴 작품들에 정보라 작가만의 것이라 얘기할 만한 세계(관)는 어떤 걸까요?


특별히 그런 건 없어요. 굳이 말하면, 무섭고 괴로운 얘기가 특징이랄까.(웃음) 지금은 모든 사람이 주인공인 시대잖아요. 그런 이야기가 고귀하고 특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주인공의 정의 자체가 바뀐 거죠. 저는 주인공이 비현실적인 일들을 겪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비현실적인 얘기를 많이 겪게 하려다 보니 작품에 귀신이 등장하고 괴물이 등장해요.

 

「본격SF소설」이라는 글 마지막 문장이 “SF는 어쨌든 가능성의 문학이니까”였어요.


‘SF는 어때야 한다’라는 말을 안 했으면 한다는 언급이었어요. 저는 근본적으로 SF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을 쓰는 모든 작가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재 혹은 소재를 다루는 구성 방식에 특징이 있을 수는 있겠죠. 모든 장르에는 장르만의 특징이 있지만, 장르에 맞는 소재를 찾고 어떻게 발전하는지는 작가들이 계속 연구할 거라고 봐요.

 

결이 맞는 작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저랑 결이 맞는 사람은 없어요.(웃음) 근본적으론 SF 작가가 아니라서요. 좋아하는 작가는 김보영 작가님이에요. 말할 수 없이 독창적이고, 세상을 보는 관점과 소재를 다루는 능력이 독보적이에요. 주제 의식이 넓고 깊고 따뜻해요.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불교적 세계관을 양자물리학적으로 이해해 쓴 『저 이승의 선지자』 . 동양 사람만 쓸 수 있는 정말 특이한 얘기예요.

 

지난해 출간한 장편 『붉은 칼』 은 “이것이 호러인지, 무협인지, 판타지인지, 역사소설인지, SF인지 알 수 없다”고 소개되어 있어요.


그건 무협이에요.(웃음) 러시아와 조선이 처음 접촉한 나선정벌 이야기인 『북정록』 관련 논문을 읽고 주인공 신유라는 인물이 멋있어서 쓰게 됐어요. 청나라도 이기지 못한 러시아 군대를 조선인 총포수들이 물리친 훌륭한 전쟁 서사인데, 재밌는 건 나선정벌을 다룬 판타지 소설 세 편이 1700년대 초반 조선을 휩쓸었다는 점이에요. 아무튼 칼싸움에 관한 내용을 쓰려다 총포수 이야기인 나선정벌과 어떻게 엮을까 하다가 총을 쓸 수 없는 환경을 만들려면 우주로 나가야지, 그러면 다 해결되겠지 하면서 SF가 됐어요. 당시 조선은 러시아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시대예요. 그런데 청나라 경계 너머에 생김새가 완벽히 다른 백인 군대가 존재했으니, 어쩌면 외계인과 조우한 상황이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요.

 

현재 진행형인 작품을 미리 귀띔해주실 수 있나요?


2018년 월드콘(세계 SF 대회)에 갔을 때 들은 특강 내용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월드콘과는 전혀 무관한 주제였는데, 현재 미국 사회에 심각하게 대두된 마약성 진통제 얘기였어요. 합법적으로 처방 받은 진통제로 중독에 이른 환자들이 출구 없는 일방적 정책 탓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사례들이 언급되는데, 이 특강을 듣고 나서 사람의 몸이란 무엇이고, 고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결국 진통제 얘기를 쓰고 싶다는 건데, 언제나 그렇듯 쓰다 보면 서론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가 되더라고요.


 


 

 

저주토끼정보라 저 | 아작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외롭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고. 그렇게 이 책은 악착 같은 저주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자, 위로에 관한 우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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