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효녀병 말기 환자입니다만
엄마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엄마 되기
아기든 아이든 어린이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아지만 나타나면 ‘강아지다!’ 내적 비명을 지르고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좇는 것과는 매우 상반된다. (2020.01.31)
언스플래쉬
내게는 아주 특수한 능력이 있는데, 근방 200m 안에 작고 귀여운 포유류가 등장하면 바로 알아채고 온갖 감각기관이 그쪽으로 반응하는 레이더 기능이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물론이요, 토끼와 라쿤까지 (실제로 동네에서 산책 나와 목줄을 한 채로 나무 타는 라쿤을 보았다. 주인은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리지 않는다. 딱 하나 예외인 포유류가 있으니, 바로 인간이다.
전 국민이 추사랑 앓이를 하던 시절부터 윌리엄과 라니 앓이를 하는 오늘날까지도 나는 KBS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즐겨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보면서 표정이 무장해제된 적도 없다. 한 마디로 아기든 아이든 어린이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아지만 나타나면 ‘강아지다!’ 내적 비명을 지르고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좇는 것과는 매우 상반된다.
아이가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니다. 방실방실한 뺨과 너른 곡선의 궁둥이를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귀엽다는 사고로 이어지기 전에 뉴런과 뉴런 사이에 벽이 하나 놓인 느낌이랄까. 그 벽은 이런 거다. 너무나 사랑스럽겠지만 그렇기에 또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위하여 아등바등 살아야 할 보호자들의 고충이 하나, 평년기온 상승 폭이 점점 가팔라지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의 앞날이 또 하나. 말하자면 나에게 아이는 번뇌를 안겨주고 시험에 들게 하는 존재인 셈. 그야말로 복잡한, 콤플렉스(complex)다.
엄마는 이런 날 보고 늘 의아해한다. 강아지는 그렇게 좋아하면서 애는 안 그러니 참 신기하다는 감상부터 시작해서 ‘네가 아이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 ‘낳으면 또 지 새끼는 얼마나 예쁜데’ 하는 예언까지 말을 아끼지 않는다. (좀 아끼셔도 좋을 텐데.) 그러다가 나와 엄마의 과거로 올라가면 이제 곧 이 주제의 대화가 끝난다는 예고다. “그래도 언니랑 달리 너는 엄마가 36개월까지 옆에서 꼭 붙어 있었는데, 뭐가 부족했니?” 물론 스물 후반의 이정연이 만 3세의 이정연이 시달린 결핍을 알 리가 없다.
바로 이렇게 ‘지 새끼’의 하나부터 열까지 살피고 셋이면 셋, 열이면 열 가지 행동마다 자기 탓 서른 개씩은 발견한다는 점이 내가 아이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두려운 것이다. 엄마가 되는 일이. 작고 연약하지만 가능성을 가진 작은 생명체를 책임진다는 일이. 그 생명체를 사랑하고 또 아끼는 일이. 평생 소중할 존재를 가지게 되는 일이.
내 입버릇 중 하나는 엄마가 나에게 잘해줄 때마다 하는 질문이다. “엄마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엄마는 그럴 때마다 ‘얘가 또 이런다’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또다시 7세 이전의 이정연 역사를 훑다가도 결국 한 문장으로 끝맺는다. “엄마잖아.” 나는 이만큼 무서운 말을 아직 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내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현실적인 성향과 재정적 문제로 설명하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둘이나 낳을 생각을 했어?”
“무지했던 거지.”
둘째 딸 앞에서 네 탄생의 비밀이 어리석음이었다고 하다니 너무하시네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어리석을 수 있는 관계란, 사람이란 얼마나 존엄하고 또 사랑스러운지. 나날이 머릿속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돌리는 나는 평생 어림짐작만 할 수 있는 영역. 36개월의 이정연은 느꼈겠지. 그때를 기억 못 해도 지금은 안다.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