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로 만든 성 - 뮤지컬 <팬레터>
자신이 만든 성으로 들어간 해진은 끝내 빠져나오길 두려워한다
팬레터 속 인물과 사랑에 빠진 해진을 위해 세훈은 내면의 히카루를 끄집어낸다. (2019. 11. 27)
천재 소설가 김해진이 그의 연인 히카루와 주고받았던 편지가 책으로 출간된다는 소문이 떠돈다. 김해진이 죽기 전 히카루에게 썼던 마지막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역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고향에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던 세훈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뮤지컬 <팬레터>는 세훈이 출간될 책에 담긴 해진의 마지막 편지를 보기 위해 감옥에 갇힌 평론가 이윤을 찾으며 시작한다. 자신이 그 편지를 봐야만 하는 이유를 이윤에게 설명하기 위해 세훈은 숨겨두었던 긴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편지로 사랑에 빠지다
이윤과 세훈, 해진은 1930년대 순수문학을 꿈꾸던 문인들의 모임인 칠인회에서 만났다. 순수문학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런 때에도 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칠인회는 문학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언젠가는 모두의 마음을 구원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때 세훈은 집을 나와 신문사 급사로 일하며 칠인회 멤버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세훈이 가장 보고싶었던 사람은 해진이다. 세훈은 해진의 소설을 읽으며 꿈을 키웠고, 그에게 팬레터를 보내며 사랑을 키웠다.
세훈은 ‘히카루’의 이름을 빌려 해진에게 편지를 보낸다. 히카루는 세훈의 필명이자 또 다른 자아의 이름이다. 세훈은 글을 쓸 때만 히카루가 되었고, 히카루로 존재하는 순간만큼은 자유를 느꼈다. 평소 세훈은 많은 것에 조심스럽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히카루는 대담하다.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게 더 중요하다.
해진은 히카루의 글과 대담한 표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세훈은 해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 안에 있던 히카루를 끄집어낸다. 열아홉 살, 여성, 싫은 건 견디지 못하는 성격, 소설 쓰는 사람, 병원에서 투병 중. 세훈은 글자만으로 히카루를 조금씩 빚어내고, 편지 속 히카루는 실존 인물이 된다.
글자로 만든 성으로 들어가다
히카루는 점점 세훈의 존재감을 뛰어넘는다. 처음엔 세훈의 내면을 대변하던 히카루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히카루의 변화는 의상과 말투, 행동, 몸짓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처음엔 세훈의 그림자이거나 세훈과 같은 동작으로 춤추던 히카루는 자신의 욕망을 말하고, 히카루와 완전히 독립해 움직인다.
자기 언어를 갖게 된 히카루는 매력적이다. 해진과 세훈의 글로 탄생한 인물이지만, 사람보다는 예술과 문학을 더욱 사랑하고 동경한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문학을 만날 수만 있다면 누구의 희생도 중요하지 않다.
뮤지컬 <팬레터>는 국내 창작 뮤지컬로 2015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우수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 사업의 최우수 선정작으로 선정됐다. 2016년 초연했으며, 국내에서는 올해가 3연째다. 작품에 등장하는 ‘칠인회’는 일제강점기 때 작가 이상과 김유정 등이 만든 순수문학 모임인 ‘구인회’를 모티프로 했다. 험난한 시대에 순수문학을 꿈꾸고 이상적인 삶을 바라는 사람들이기에 편지만으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사람을 글로 알아가는 건 매력적이다.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을 글만으로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착각일 수밖에 없다. 극 중 해진은 자신이 지은 ‘글자로 만든 성’에 스스로 들어갔음을 고백한다.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것 역시 자신이기에, 누구도 탓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뮤지컬 <팬레터>는 2020년 2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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