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 저널리스트 이규연 “추악한 진실을 대면하라”
『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이규연 저자 인터뷰
한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가슴을 치지만, 정의는 지연됩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기만과 폭력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2019.10.11)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의 탐사 저널리스트 이규연 저자는 사건의 이면과 사람의 참지 못할 울음에 주목한다. 『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은 암흑의 핵심으로 파고들어가 빛을 발견하는 일과,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한 탐사 저널리스트의 기록이다. 누군가 고통받는 시간이자 정의가 지연되는 시간인 ‘로스트 타임’을 줄이기 위해 저자가 뛰어다녔던 현장 속에서, 우리는 지난 30년간 탐사보도 한길을 걸으며 그 길을 개척해온 공익 탐정의 분투와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특정한 사건과 굉장히 인연이 깊었다고 들었어요. 어떤 사건이고 무슨 일을 겪으셨나요?
정확히는 인쇄 중, 그리고 강연 중이었습니다. 편집자가 곧 인쇄를 시작한다고 해서 이제 책이 나오겠구나 했는데 며칠 후에 속보가 떴어요.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잡혔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다룬 36개 사건 중에 화성 사건도 포함됩니다. 그때는 후속 취재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날 오전에 혹시 원고를 수정할 수 있는지 편집자에게 물어봤어요. 원고에선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지만,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가능하면 수정하고 싶었거든요. 인쇄는 모두 끝난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제본 전이라 몇 페이지만 새로 찍어서 갈아 끼울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은 책 출간 후 강연을 하는 자리였어요. 질문을 받는 시간에 갑자기 또 속보가 떴습니다. 그 용의자가 자백했다고요. 그래서 책을 홍보할 때 마케터가 그 사건을 키워드로 계속 이용했습니다.
지난 30년간 탐사 저널리스트로 한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이었어요. 무심코 전화를 받았는데 첫마디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 손가락이 녹아가고 있어요.” 일단 만나보자 그랬어요. 정말 그분 손가락이 반 마디쯤 없는 거예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 하고선 병원비를 제가 댔습니다. 방사선 피폭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피폭 차단 용구는커녕 방사선 위험에 대한 사전 교육도 없었던 일터에서 일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것으로 기사를 썼는데 후폭풍이 상당했습니다. 과학기술부는 방사선 취급 현장에 대한 일제 점검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아, 탐사보도의 영향력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그해에, 제보를 했던 조선소 용접공은 배상을, 저는 특종상을 받았습니다. 탐사란 이런 것이구나, 기자로서 해볼 만한 일이구나 하고 느꼈죠.
책의 제목 ‘로스트 타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스포츠에서 ‘로스트 타임’은 어떤 연유로 지체된 시간을 뜻합니다. 이 시간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법과 정치, 경제에도 출몰합니다. 우리가 방관하는 사이 누군가 고통받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누군가는 가슴을 치고, 그만큼 정의는 지연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겪었던 사건 하나의 무게가 너무 커서 그 사건이 나머지 모든 삶을 지배해버리기도 해요. 저는 무지와 무관심, 기만과 폭력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영화 <스포트라이트>에 「보스턴 글로브」지의 사건 취재 과정이 소상하게 담겨 있어요. 바로 사제들의 아동 성폭력 사건입니다. 이 고발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영화 말미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전에도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을 제보받았지만 타성에 젖어 취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영화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에게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신임 편집국장이 지적하고 나서기 전까지 기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고요. 피해 아동과 그 가족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셈이지요. 이렇게 대부분의 로스트 타임은 나태나 관성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로스트 타임을 줄여야만 정의도 빨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탐사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군요. 탐사에 대한 나름의 정의와 직업관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큰 악을 대면할 때 공포를 느낍니다. 그것에 압도당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런 공포만 있다면 정의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모여야 정의가 그 소리를 듣습니다. 탐사는 불의에 대한 그 무분별한 공포를 정당한 분노로 바꾸어서, 정의를 불러내는 일입니다. 앞서 ‘로스트 타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의가 일찍 도착할수록 고통받는 시간은 줄어들겠지요. 그러니까 탐사 저널리스트는 사라진 누군가의 시간, 목소리, 삶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직업입니다. 그러려면 참혹하고 추악한 진실이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직접 취재했던 사건과 인터뷰했던 사람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36개 현장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어떤 사건이든 피해자의 이야기는 가슴 아프지만, 피해자의 나이가 어릴 때는 저도 타격을 꽤 크게 받고 또 그것이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조두순 사건,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가습기 살균제 대참사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조두순은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자입니다. 나영이에게 상처를 입히고선 한겨울에 물을 틀어놓고 나가버렸죠. 사실상 살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 그 후의 조사 및 재판 과정이 나영이에겐 더 악랄했습니다. 피해자로서의 어떤 배려도 받지 못했지요. 심지어 조두순은 심신 미약을 이유로 12년형으로 감형되어 곧 출소를 앞두고 있습니다. “법은 나영이에게 등을 돌리면서 조두순에게는 손을 벌렸습니다”라는 나영이 아버지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감형의 조건은 더 까다로워야 하고, 성범죄자 출소 후 전자발찌 제도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또한 피해 아동 어머니의 노력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살인 공소시효법 폐지 논의를 재점화했습니다. 결국 살인 공소시효법은 폐지됐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적용을 받지 못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상자는 2천 명을 헤아리고 있는데 어린 피해자가 많습니다. 평생 호흡기를 달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는 상황입니다. 세 사건 모두 피해자들의 희생이 그냥 희생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탐사 저널리스트로서 지금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오랫동안 취재를 해보니 결국 두 가지로 모아졌습니다. 바로 환경 문제와 남북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얼마 전 북극으로 취재를 다녀온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방송에서도 들려주었지만, 북극의 빙하가 녹는 소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만큼 빠르게 빙하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북극곰의 절규도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북극에선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비명은 한반도에도 분명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눈에 띄는 대단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환경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시청자가 각성하게 하는 것이 탐사의 주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남북 대화가 재개되는 시점에 맞춰 평양의 최근 모습을 방송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평양은 10년 가까이 베일에 싸여 있었어요. 그 방송 1개월 전만 해도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계에서는 다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화해 무드를 점쟁이처럼 예측하고 취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취재 시작 무렵만 해도 전쟁설이 더 우세했습니다. 모두가 ‘더 격한 대결’을 예상했지만 저는 ‘대화의 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또한 남북이 첨예하게 갈등할수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국은 남북 모두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양의 최근 모습을 보여주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판단했고, 갑작스러운 화해 무드와 맞물려 좋은 반응까지 얻었습니다.
각 장에 끝에 실린 ‘탐사 노트’를 보면 탐사보도 취재 원칙과 요령도 사건 현장만큼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노하우 외에도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가난의 대물림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난곡 리포트’)를 취재해 반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정신을 의식하고 있었던 덕분입니다. 사건의 중대성을 강조해서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내야 하고 그 분노는 반드시 변혁의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의 중대성을 잘 판단해야 하고,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사회의 변화 양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지요. 이것은 저널리스트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전에, 개인의 성향도 중요합니다. 탐사를 업으로 하고 싶은 분들은 본인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다방면에 호기심을 가지고 영역을 확장하는 수평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의 문제에 꽂히면 그것과 관련된 팩트를 캐내려 하는 수직적인 인간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탐사 저널리스트란 그야말로 암흑의 핵심으로 파고들어가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그곳에 빛이 있는지, 의미 있는 팩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말입니다.
팩트를 팩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진실을 구성하기 위한 고리로 파악하는 시야도 필요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추악하고 참혹한 그것을 대면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부정해서는 안 되고요. 정의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로스트 타임’을 되돌려주는 일, 그것이 바로 탐사 저널리스트의 일입니다.
*이규연
탐사 저널리스트. 중앙일보 탐사기획 에디터, JTBC 초대 보도국장을 거쳐 현재 탐사기획국장으로 탐사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기획 및 진행을 맡고 있다. 2005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탐사보도협회 특별상을, 두 번의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이규연의 로스트 타임이규연 저 | 김영사
누군가 고통받는 시간이자 정의가 지연되는 시간인 ‘로스트 타임’을 줄이기 위해 그가 뛰어다녔던 현장 속에서, 우리는 지난 30년간 탐사보도 한길을 걸으며 그 길을 개척해온 공익 탐정의 분투와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태그: 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이규연 저널리스트, 정의, 무관심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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